아프리카의 사자 메넬리크 2세: 아드와 전투와 에티오피아 통일의 비밀 (Menelik II)


불굴의 사자: 메넬리크 2세, 에티오피아 황제의 위대한 여정


마그달라의 어린 포로

1855년, 셰와 왕국에 피바람이 몰아쳤다. 

분열된 제국의 재통일을 꿈꾸던 테워드로스 2세 황제의 군대가 반독립 상태였던 셰와를 굴복시키기 위해 밀려온 것이다. 

이 혼란의 한복판에서 11살의 어린 왕자 사흘레 마리암은 아버지 하일레 멜레코트 왕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함께 모든 것을 잃었다.

왕국은 무너졌고, 그는 하루아침에 포로가 되어 험준한 산악 요새 마그달라로 끌려가는 신세가 되었다. 

아버지의 죽음을 목도한 충격과 자신의 왕국이 짓밟히는 광경을 지켜보는 무력감 속에서, 어린 왕자는 두려움과 혼란에 휩싸여 자신을 사로잡은 위대한 황제 테워드로스를 마주해야 했다.

이 비극적인 운명의 소년이 바로 훗날 에티오피아를 통일하고, 유럽 제국주의의 거센 파도에 맞서 조국의 독립을 지켜내며 '현대 에티오피아의 아버지'라 불리게 될 위대한 황제, 메넬리크 2세이다. 

그의 이야기는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시작된 한 편의 위대한 서사시와 같다.


1장: 황금 새장 속의 왕자

마그달라 요새의 삶은 차가운 감옥이 아니었다. 

테워드로스 2세 황제는 어린 포로 사흘레 마리암을 단순한 인질로 대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에게서 무언가 특별한 가능성을 보았는지, 황제는 어린 포로를 아들처럼 아끼며 전통적인 교회 교육을 포함한 최상의 교육을 베풀었다. 

훗날 메넬리크는 평생의 숙적이 된 그를 존경과 슬픔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으로 회상하며, 테워드로스를 "나를 교육한 분"이라 칭했다.


황제의 총애는 깊어져, 1864년에는 자신의 딸인 알타쉬 테워드로스 공주와 결혼시키기까지 했다.

겉으로는 황제의 사위로서 안락한 삶을 누리는 듯했지만, 그의 마음속 불꽃은 결코 꺼지지 않았다.


"황제 폐하의 은혜는 감사하지만, 나의 땅 셰와는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 언젠가는 돌아가야 할 곳..."


이 황금 새장은 그를 가두기 위한 것이었지만, 역설적으로 그가 권력의 모든 것을 배우는 학교가 되었다. 

매일 그는 황제의 통치술과 군사 전략을 지켜보고, 들으며, 배웠다. 

10년간의 포로 생활은 그가 운명의 왕좌를 되찾기 위한 최고의 준비 기간이 된 것이다.


메넬리크 2세


2장: 셰와의 속삭임과 탈출 계획

메넬리크가 마그달라에서 억류 생활을 하는 동안, 그의 고향 셰와는 분노로 들끓고 있었다. 

테워드로스 2세가 왕족이 아닌 평민 출신 '아토 베자베'를 통치자로 임명했기 때문이다. 

이는 솔로몬 왕의 후예라는 자부심으로 가득했던 셰와의 귀족들에게는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다.


어두운 밤, 셰와의 귀족들이 비밀리에 모여들었다. 

그들의 대화에는 왕자에 대한 변치 않는 충성심과 셰와의 자존심이 담겨 있었다.


귀족 1: "평민 따위가 셰와를 다스리다니! 이는 솔로몬의 후예에 대한 모욕이다!"

귀족 2: "우리의 진정한 왕은 마그달라에 계신다. 그분을 다시 모셔와야만 하네."


그들의 충성심은 마침내 구체적인 탈출 계획으로 이어졌다. 

이 계획의 성공을 위해서는 강력한 조력자가 필요했다. 

셰와 귀족들은 울로 지역의 여왕 월키투와 황제의 총신이었던 모하메드 알리에게 은밀히 도움을 요청했다. 

이들은 메넬리크의 탈출이 가져올 정치적 변화를 계산하며 위험한 도박에 동참하기로 결정했다.

치밀하게 세워진 탈출 계획은 마침내 실행의 날을 맞이했고, 이는 메넬리크의 운명뿐만 아니라 에티오피아 전체의 역사를 뒤바꿀 거대한 도박의 시작이었다.


3장: 자유를 향한 극적인 탈출

1865년 7월 1일, 달빛조차 숨은 칠흑 같은 밤. 

마침내 메넬리크는 조력자들의 도움을 받아 마그달라 요새의 삼엄한 경비를 뚫고 탈출을 감행했다. 

사랑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을 믿었던 아내, 알타쉬 공주를 남겨두고 떠나는 그의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하지만 조국을 되찾아야 한다는 사명감이 그의 발걸음을 재촉했다.

탈출 소식이 전해지자 황제의 궁정은 공포에 휩싸였다. 

테워드로스는 화산처럼 분노를 터뜨렸다. 

그의 분노는 단순한 배신감을 넘어 자신의 딸마저 버려졌다는 사실에 극에 달했다.


테워드로스 2세: "감히 나를 배신하고 도망쳐? 내 딸을 버리고 가다니! 이 배신에 대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해주겠다!"


황제는 분노에 차 29명의 오로모 인질을 학살하고, 12명의 셰와 귀족들을 대나무 막대로 때려죽이는 잔혹함을 보였다.

한편, 탈출에 성공한 메넬리크는 험난한 여정 끝에 마침내 고향 셰와 땅에 발을 디뎠다. 

그의 귀환은 단순히 한 왕자의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셰와의 부활을 알리는 봉화이자, 에티오피아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여는 신호탄이었다.


4장: 셰와의 사자가 돌아오다

"왕자님이 돌아오셨다!"

메넬리크가 셰와로 돌아왔다는 소식은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백성들은 환호하며 그에게 몰려들었고, 셰와의 통치자였던 아토 베자베의 군대마저 그를 버리고 진정한 왕의 깃발 아래로 모여들었다. 

대세가 기울었음을 깨달은 베자베는 도망쳤고, 메넬리크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자신의 왕국을 되찾았다.

그는 안코바르에 입성하여 셰와의 왕, 즉 '네구스(Negus)'로 즉위했다. 

백성들의 열광적인 환호 속에서 왕좌에 오른 그는 힘찬 목소리로 선언했다.


메넬리크: "셰와의 아들딸들이여! 내가 돌아왔다! 이제 우리는 잃어버린 영광을 되찾고, 누구도 우리를 얕보지 못하게 할 것이다!"


왕위에 오른 메넬리크의 첫 행보는 단순한 축하를 넘어, 치밀하게 계산된 정치적 포석이었다. 

그는 셰와를 되찾은 것에서 그치지 않고, 백성들의 마음을 완벽하게 사로잡아 자신의 통치 기반을 반석 위에 올려놓고자 했다. 

3일간의 호화로운 축제는 백성들의 충성심을 확보하기 위한 관용의 표현이었고, 이슬람교도들과의 동맹은 과거 통치자들을 괴롭혔던 내부 분열을 사전에 차단하는 전략적 수완이었다. 

그는 젊은 나이부터 탁월한 정치 감각을 보여주었다.


리더십 특징
구체적 행동
목표 및 효과
관용과 포용
3일간의 호화로운 축제 개최
백성들의 지지와 민심 확보
전략적 동맹
이슬람교도들과의 우호 관계 구축
내부 분열을 막고 통합 기반 마련
실리 외교
프랑스, 이탈리아와 접촉 시작
현대 무기 확보 및 국제적 입지 강화


셰와의 왕좌에 만족하지 않았던 메넬리크의 시선은 더 높은 곳, 바로 에티오피아 전체를 향하고 있었다. 

그는 제국의 황제가 되기 위한 치밀하고 장기적인 전략을 세우기 시작했다.


메넬리크 2세를 묘사한 오래된 프랑스 신문 "Le Petit Journal"의 한 페이지


5장: 제국의 꿈을 향한 인내와 전략

셰와의 왕으로서 메넬리크는 에티오피아의 황제 요하네스 4세와 신중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는 정면으로 황제의 권위에 도전하는 대신, 때를 기다리며 자신의 힘을 키우는 전략적 인내심을 보였다. 

그의 전략적 사고는 두 가지 핵심 활동에서 빛을 발했다.


• 근대 무기 확보: 1876년, 그는 이탈리아 탐험가들을 만났다. 

서양인들은 그가 "소년 같은 호기심"과 "무기에 대한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고 기록했다. 

그는 현대 기술의 중요성을 일찌감치 간파하고 있었습니다.

• 권력 기반 다지기: 그는 내부의 위협에도 현명하게 대처했다. 

북쪽 울로족의 반란을 진압했으며, 심지어 자신의 두 번째 아내 베파나가 이전 결혼에서 낳은 자신의 아들을 왕위에 앉히려는 음모를 꾸몄을 때도 이를 단호하게 분쇄하며, 가장 가까운 곳의 위협마저 관리하는 냉철한 정치력을 보여주었다.


메넬리크는 당장의 욕심에 휘둘리지 않고, 제국의 상황을 예리하게 주시하며 힘을 키우는 진정한 전략가였다. 

그는 자신의 차례가 올 것임을 믿고 묵묵히 기다렸다.

운명은 마침내 인내하는 자에게 기회를 가져다주었고, 에티오피아의 역사는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6장: 마침내 황제의 자리에 오르다

1889년 3월 10일, 운명의 추가 메넬리크에게 기울었다. 

요하네스 4세 황제가 수단과의 갈라바트 전투에서 갑작스럽게 전사한 것. 

이 소식은 메넬리크에게 황제의 자리로 가는 길을 활짝 열어주었다.


요하네스 4세는 죽기 직전, 자신의 친아들이 먼저 세상을 떠나자 아들로 입적한 조카 멩게사 요하네스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하지만 메넬리크는 신속하게 움직여 자신의 혈통적 정통성을 내세우며 황제 즉위를 선언했다.


"요하네스 가문은 모계를 통해 솔로몬의 피를 이었지만, 나 사흘레 마리암은 솔로몬 왕으로부터 끊어지지 않는 부계 혈통을 직접 이은 유일한 후계자다!"


그의 주장은 단순한 혈통 자랑이 아니었다. 

솔로몬 왕조의 깊은 전통 속에서, 끊어지지 않는 남성 직계 혈통은 그 어떤 것보다 강력한 종교적, 상징적 권위를 가졌다. 

모계를 통해 혈통을 이은 멩게사의 계승권은 메넬리크의 정통성 앞에서 힘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대부분의 귀족들과 에티오피아 정교회는 그의 정통성을 인정하고 지지를 보냈다. 

마침내 1889년 11월 3일, 메넬리크는 엔토토산의 마리아 성당에서 화려하고 웅장한 대관식을 거행하며 에티오피아 제국의 황제, 메넬리크 2세로 즉위했다.


마그달라의 어린 포로에서 셰와의 왕으로, 그리고 마침내 에티오피아 제국의 황제가 된 메넬리크 2세.

하지만 그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제 그는 분열된 제국을 통합하고, 아프리카를 향해 밀려오는 유럽 제국주의의 거대한 파도에 맞서 에티오피아의 독립을 지켜내야 하는 더 큰 시련의 시작점에 서 있었다. 

불굴의 사자는 이제 막 그의 진정한 위업을 시작하려 하고 있었다.


7장: 아프리카의 뿔에 떠오른 새로운 태양

19세기 말, 유럽 열강들이 자와 칼을 들고 아프리카 대륙을 조각내던 '아프리카 분할' 시대의 광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대륙의 거의 모든 왕국이 식민지로 전락하던 그때, 에티오피아 제국은 역사의 갈림길에 서 있었다.

이제 그의 앞에는 더 큰 시련이 펼쳐져 있었다. 

수백 년간 이어진 내부 분열로 제국은 조각나 있었고, 바다 건너에서는 이탈리아라는 새로운 적이 호시탐탐 에티오피아를 노리고 있었다. 

과연 그는 분열된 제국을 하나로 묶고, 거대한 외세의 파도로부터 조국의 독립을 지켜낼 수 있을까?


분열된 제국을 하나로: 철권과 관용의 통치

황제가 된 메넬리크 2세의 첫 번째 과제는 이름뿐인 제국을 실질적인 통일 국가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는 철권과 관용을 동시에 사용하는 노련한 정치가였다. 

북부와 중서부의 영주들은 대부분 그의 권위를 인정하고 충성을 맹세했다. 

하지만 완강히 저항하던 고잠 지역 같은 세력에게는 강력한 군사력을 동원해 무릎 꿇리고 복속시켰다.

반면, 남서부의 부유한 짐마 왕국처럼 평화롭게 제국에 편입된 지역에는 기존 통치자의 자치권을 인정해주며 갈등을 최소화하는 관용을 보였다.


그의 시선은 곧 남쪽의 광활한 영토로 향했다. 

오로모, 시다마, 월라이타 등 여러 민족이 사는 지역으로 제국을 확장하는 과정은 두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국가 통합이라는 거대한 목표 아래 그의 정복 활동은 극도로 잔혹했다. 

저항하는 이들에게는 고문, 대량 학살, 대규모 노예화가 자행되었고, 일부 기록에 따르면 전쟁과 그 여파로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논쟁)

이 피의 역사는 훗날 현대 에티오피아 내 민족 갈등의 깊은 상처로 남게 되었다.


이 정복 과정은 비극적인 재앙이었다. 

1888년부터 1892년까지 '대기근'이 닥쳤고, 설상가상으로 이탈리아인들이 수입한 소를 통해 퍼진 가축 전염병 '우역(Rinderpest)'이 에티오피아를 휩쓸었다. 

이 재앙으로 에티오피아 가축의 90% 이상이 폐사했다. 

특히 목축에 의존하던 남부 민족들은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고, 이는 역설적으로 메넬리크의 군대가 이 지역을 정복하는 것을 더 용이하게 만들었다.


제국의 영토가 확장되자, 메넬리크는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기로 결심했다. 

그의 아내이자 가장 현명한 정치적 조언자였던 테이투 베툴 황후는 엔토토산 남쪽에서 피어오르는 온천을 발견했다. 

그녀는 그곳의 전략적 가치와 아름다움을 꿰뚫어 보고 황제를 설득했다.


테이투 황후: "폐하, 이 따뜻한 온천이 솟아나는 아름다운 땅을 보십시오. 방어에 유리하고 기후도 온화하니, 이곳이야말로 우리 제국의 새로운 심장이 될 자격이 충분합니다."

메넬리크 2세: "황후의 안목이 옳소. 이곳에 '새로운 꽃'이라는 의미로 아디스아바바라는 이름의 도시를 세워 제국의 영원한 수도로 삼겠소."


이렇게 탄생한 아디스아바바는 에티오피아 근대화의 상징이 되었다. 

제국은 외형적으로 통일되었지만, 그 통일을 위협하는 더 거대한 그림자가 북쪽에서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1889~1896년경 메넬리크의 원정


8장: 교활한 조약과 드리워진 전운: 우찰레 조약의 진실

메넬리크 2세는 제국의 패권을 잡기 위해 이탈리아와 손을 잡는 전략적 선택을 했다. 

당시 북부의 강력한 경쟁자였던 멩게샤 요한네스를 견제하고, 유럽의 근대 무기를 확보하기 위해 1889년 이탈리아와 우찰레 조약을 체결한 것이다. 

하지만 이 조약에는 이탈리아가 교묘하게 숨겨둔 독소 조항이 있었다.

문제는 조약 제17조였다. 

같은 조항이 에티오피아의 암하라어와 이탈리아어로 완전히 다르게 기록되어 있었던 것이다.


언어
제17조 해석
의미
암하라어
에티오피아 황제는 다른 국가와 외교 시 이탈리아 정부를 이용할 수 있다.
이탈리아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선택권 보유
이탈리아어
에티오피아 황제는 다른 국가와 외교 시 이탈리아 정부를 통해야 한다.
사실상의 보호국으로 외교권 상실


이탈리아는 이 조항을 근거로 유럽 전역에 에티오피아가 자국의 보호국이 되었다고 선포했다. 

뒤늦게 이 기만적인 속임수를 알게 된 메넬리크 황제는 격노했다.


"이것은 우호 조약이 아니라 속임수다! 에티오피아는 결코 다른 나라의 보호를 받는 속국이 되지 않을 것이다. 이 조약은 무효임을 선언한다!"


1893년, 메넬리크는 조약의 공식 폐기를 선언했다. 

회유와 협박에 실패한 이탈리아는 결국 무력으로 에티오피아를 굴복시키기로 결심했다. 

1894년, 이탈리아군은 에리트레아를 기지로 삼아 에티오피아 침공을 개시했다. 

피할 수 없는 전쟁의 서막이 오른 것이다.


9장: 아드와, 아프리카의 운명을 건 전투

1895년, 이탈리아의 침공에 맞서 메넬리크 2세는 전국의 귀족과 백성에게 군대 소집을 명령하는 격문을 발표했다. 

그의 목소리는 제국 전역에 결연하게 울려 퍼졌다.


"적이 바다를 건너왔다. 그는 우리의 조국과 신앙을 파괴하기 위해 국경을 넘었다. ... 신의 도움으로 나는 조상들의 유산을 지키고, 무력으로 침략자를 물리칠 것이다. 힘이 있는 모든 자는 나를 따르라!"


황제의 호소에 에티오피아 전역에서 약 10만 명이 넘는 대군이 집결했다. 

이탈리아는 에티오피아의 군사력을 철저히 과소평가했다. 

그들은 아프리카 군대가 낡은 창칼로 무장한 오합지졸일 것이라 믿었지만, 실상은 달랐다. 

메넬리크는 수년간 프랑스, 러시아 등과의 외교를 통해 군대를 수만 정의 최신 소총과 호치키스 속사포 등 유럽의 근대 무기로 무장시킨 상태였다.


1896년 3월 1일, 운명의 날이 밝았다. 

이탈리아군은 아드와의 험준한 산악 지형에서 공격을 개시했지만, 그들이 가진 지도는 치명적으로 부정확했다. 

이탈리아 부대들은 좁은 계곡에서 길을 잃고 뿔뿔이 흩어지며 혼란에 빠졌다.

메넬리크의 군대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지형의 이점을 완벽하게 활용하여 흩어진 이탈리아군을 차례로 포위하고 섬멸하는 전술을 펼쳤다. 

전투는 에티오피아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다.


승리의 여세를 몰아 이탈리아의 식민지인 에리트레아까지 해방시킬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메넬리크는 진군을 멈추고 평화 협상을 선택했다. 

이는 감정이 아닌 냉철한 현실 인식에 기반한 대전략가의 결단이었다.


• 군대의 보급 문제: 대기근의 여파로 10만 대군을 유지할 보급품이 바닥나고 있었다.

• 외교적 고립 우려: 영국 등 다른 유럽 열강은 이탈리아가 그 지역에 남아 있기를 원했기에, 전면전은 더 큰 전쟁과 외교적 고립을 초래할 수 있었다.

• 전쟁 목표 달성: 전쟁의 핵심 목표였던 이탈리아의 야욕을 꺾고 에티오피아의 완전한 독립을 인정받는 것을 이미 달성했다.


아드와 전투의 승리는 에티오피아의 독립을 지켰을 뿐만 아니라, 유럽 제국주의의 파도 아래 신음하던 전 세계 아프리카인들에게 저항의 상징이자 희망의 등불이 되었다.


에티오피아 이탈리아 전쟁


10장: 독립을 지켜낸 외교가와 개혁가

아드와 전투의 승리는 메넬리크 2세에게 강력한 외교적 무기를 쥐여주었다. 

그는 승자의 위치에서 이탈리아와 아디스아바바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의 핵심은 이탈리아가 우찰레 조약의 완전 폐기를 인정하고 에티오피아의 절대적인 독립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이후 메넬리크 2세는 뛰어난 외교가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는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 유럽 열강들과 대등한 위치에서 협상하여 국경을 확정하고 국가의 주권을 공고히 했다. 

그는 열강들이 서로를 견제하도록 만드는 교묘한 외교술로 에티오피아의 이익을 극대화했다.

외교적 안정을 바탕으로 그는 국가의 체질을 바꾸는 근대화 개혁에 박차를 가했다.


• 사회 기반 시설 구축: 수도 아디스아바바와 프랑스령 지부티 항구를 잇는 철도 건설을 시작했으며, 근대 우편 제도를 도입하고 전국에 전화와 전신을 설치하여 소통망을 현대화했다.

• 경제 시스템 현대화: 에티오피아 최초의 근대 은행인 '아비시니아 은행'을 설립하여 국가 재정의 기틀을 마련했다.

• 행정 개혁: 오랜 악습이었던 노예 무역 금지 정책을 강력하게 시행하고, 중앙집권적 행정 체계를 도입하여 황제의 통치력을 강화했다.


메넬리크 2세의 이러한 노력 덕분에, 에티오피아는 제국주의의 광풍 속에서 아프리카 대륙에서 유일하게 독립을 지켜내며 근대 국가의 기틀을 성공적으로 마련할 수 있었다.


1897~1904년경 메넬리크의 원정


11장: 황혼과 새로운 시대의 여명

에티오피아를 반석 위에 올려놓은 메넬리크 2세에게도 시간의 흐름은 피할 수 없었다. 

1909년, 그는 갑작스러운 뇌졸중으로 쓰러져 더 이상 국정을 돌볼 수 없게 되었다. 

황제가 쓰러지자 그의 아내 테이투 베툴 황후가 섭정을 맡아 나라를 이끌었지만, 그녀의 강한 권력에 반감을 품은 귀족들이 그녀를 권좌에서 밀어내고 말았다.


1913년 12월 12일, 아프리카의 사자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의 죽음은 한동안 비밀에 부쳐졌고, 장례식도 조촐하게 치러진 뒤 황궁 내 교회에 비밀리에 안장되었다.

그의 사후 후계 구도는 혼란스러웠다. 

그가 후계자로 지명했던 외손자 이야수 5세는 에티오피아의 전통적인 적들과 손잡고 이슬람으로 개종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교회로부터 파문당하고 폐위되었다. (논쟁)

결국 1916년, 그의 딸인 자우디투가 에티오피아 역사상 최초의 여제로 즉위하며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메넬리크 2세는 오늘날 '현대 에티오피아의 아버지'로 불린다. 

그는 분열된 나라를 통일하고, 유럽 열강의 침략을 막아냈으며, 근대화의 초석을 다졌다. 

하지만 그의 유산에는 빛과 그림자가 공존한다. 

제국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정복 전쟁의 잔혹성은 에티오피아 내부에 깊은 구조적 균열을 남겼고, 이는 오늘날까지도 이어지는 저항과 억압, 분열의 악순환을 낳았다. 

그는 시대를 앞서간 개혁가이자 냉혹한 정복자였으며, 그의 복합적인 모습이야말로 격동의 시대를 살아낸 한 위대한 지도자의 진정한 초상일 것이다.


이 글은 메넬리크 2세와 에티오피아 근현대사를 다룬 여러 연구서·논문·공개 아카이브를 바탕으로 하되, 독자의 몰입을 위해 장면 묘사와 대사, 인물의 내면은 소설적으로 각색한 서사형 역사 글입니다.

연대기적 사실·연도·지명·전투명·인물 관계는 최대한 현재의 역사 연구 성과에 맞추어 정리했지만, 일부 해석이 갈리는 대목은 여러 설 중 하나를 선택해 서사에 맞게 재구성했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글은 교과서식 단정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 위에 쌓은 이야기”로 이해해 주시고, 중요한 연구·인용에 활용하실 때에는 반드시 1차 사료와 전문 연구서를 함께 참고하시길 권합니다.


Menelik II, born Sahle Maryam, is seized as a child by Emperor Tewodros II and raised in the mountain fortress of Magdala, where he studies power and war while dreaming of his lost homeland Shewa. 

In 1865 he escapes, returns to Shewa and, welcomed by nobles and peasants, reclaims the crown of negus. 

Over the next decades he expands his rule, makes Addis Ababa the capital and builds a larger empire through deals and harsh conquest in the south. 

He imports rifles, telegraphs, banks and a railway while European empires carve up Africa. 

When Italy claims Ethiopia as a protectorate, he musters a vast multiethnic army and wins the Battle of Adwa in 1896, preserving independence but leaving a legacy that mixes national pride with deep woun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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