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7년, 낯선 땅으로 떠밀려간 우리 민족 이야기: 고려인
할아버지가 부르던 슬픈 노래
우즈베키스탄에서 태어난 고려인 김 블라디미르 페트로비치 씨는 어린 시절을 이렇게 기억합니다.
노래 솜씨가 좋았던 아버지가 고려어로 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면, 이웃에 살던 고려인 어른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습니다.
아버지의 노래를 듣는 어른들은 조용히 눈물을 훔치곤 했습니다.
김 블라디미르 씨는 아버지가 불렀던 노래 가락을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가지 가지 마요, 떠나가지 마요..."
헤어짐의 아픔을 담은 이 애절한 노래는 무슨 사연을 담고 있었을까요? 왜 노래를 듣는 이들은 모두 눈물을 흘려야만 했을까요?
이것은 단순히 한 개인의 가족사가 아닙니다.
'고려인'이라 불리는 우리 민족이 함께 겪었던, 차디찬 열차에 실려 낯선 땅으로 떠밀려가야 했던 거대한 비극의 서막이었습니다.
이제부터 그 잊혀 가는 역사의 페이지를 함께 넘겨보겠습니다.
1. 희망을 찾아 건넌 두만강, 항일운동의 심장이 되다
'고려인'의 역사는 19세기 후반, 가난과 억압을 피해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 나선 조선의 백성들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들이 희망을 품고 두만강을 건너 정착한 곳은 러시아의 '연해주(沿海州)'였습니다.
당시 연해주는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척박한 땅이었지만, 우리 민족에게는 새로운 기회의 땅이었습니다.
그들은 맨손으로 황무지를 옥토로 바꾸며 끈질기게 삶의 뿌리를 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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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0년대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 거주하던 조선인들 |
하지만 연해주는 단순한 삶의 터전이 아니었습니다.
일제강점기가 시작되자, 이곳은 조국 독립을 위한 항일 독립운동의 뜨거운 심장부가 되었습니다.
블라디보스토크에 세워진 한인 마을 '신한촌'은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모여드는 중심지 역할을 했습니다.
1909년, 안중근 의사를 비롯한 12명의 동지들이 조국 독립을 맹세하며 손가락을 잘랐던 '단지동맹'이 맺어진 곳도 바로 이곳 연해주였습니다.
연해주에 살던 수많은 고려인들은 독립운동가들에게 자신의 집을 거처로 내어주고, 밥을 지어 먹이며, 군자금을 지원하는 등 이름 없이 조국의 독립에 힘을 보탰습니다.
이들의 희생과 헌신이 있었기에 연해주가 희망의 땅으로 불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희망은 왜 그리도 쉽게 꺾여야 했을까요?
2. 갑작스러운 비극: 우리는 왜 쫓겨나야 했을까?
1937년 8월 21일,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은 "극동 지방의 고려인을 중앙아시아로 이주시키라"는 비밀 명령을 내립니다.
평화롭게 살아가던 약 17만여 명의 고려인들에게는 그야말로 날벼락 같은 소식이었습니다.
소련 정부는 왜 이런 잔인한 결정을 내렸을까요?
그들이 내세운 명분과 실제 숨겨진 이유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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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
명분 (소련 정부의 공식 발표)
일본 첩자 침투 방지
고려인과 일본인의 외모가 비슷해 간첩을 가려내기 어렵다는 이유를 내세웠습니다.
실제 이유들 (숨겨진 배경)
정치적 불신: 국경 지대에 사는 소수민족을 믿을 수 없는 세력으로 여겼습니다.
경제적 목적: 중앙아시아의 척박한 땅을 개척할 노동력이 필요했습니다.
사전 통제: 고려인 사회의 성장을 막고 자치권 요구 등 미래의 위협 가능성을 미리 차단하려 했습니다.
3. 눈물의 기차: 끝이 보이지 않는 여정
강제이주 명령이 떨어진 후, 고려인들은 짐을 꾸릴 시간도 제대로 갖지 못한 채 화물열차에 실렸습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중앙아시아의 황무지까지, 약 6,000~6,500km에 달하는 죽음의 여정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들이 탄 열차는 사람이 타는 객차가 아닌, '와곤(vagon)'이라 불리는 창문 없는 화물칸 혹은 가축 운송칸이었습니다.
짐짝이나 가축을 싣던 좁은 칸 하나에 5~6가구, 약 30명이 빽빽하게 실렸습니다.
허리를 제대로 펼 수도, 편히 앉을 수도 없는 지옥 같은 공간이었습니다.
화장실은 당연히 없었고, 음식과 물은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추위와 굶주림, 각종 질병이 사람들을 덮쳤고, 열차는 달리는 관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당시 생존자들은 "열차가 설 때마다 사람을 땅에 묻는 게 일상사"였다고 증언합니다.
가족의 죽음을 슬퍼할 겨를도 없이, 얼어붙은 땅에 시신을 묻고 다시 열차에 올라야 했던 사람들의 절망은 얼마나 깊었을까요?
이 끔찍한 여정 속에서 적게는 1만 6천 명에서 많게는 5만 명에 이르는 고려인들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기나긴 고통의 시간이 끝나고 마침내 열차가 멈춘 곳은, 그들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황량한 땅이었습니다.
4. 황무지에서의 생존: 눈물로 뿌린 삶의 씨앗
열차에서 내던져진 고려인들 앞에는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뿐이었습니다.
당장 살 곳도, 먹을 것도 막막한 상황. 특히 혹독한 중앙아시아의 첫 겨울을 나기 위해 그들은 땅을 파고 들어가 움집을 짓는 '토굴(土窟)' 생활을 해야만 했습니다.
카자흐스탄 우슈토베에 세워진 비석에는 당시의 처절했던 상황이 이렇게 새겨져 있습니다.
'이곳은 원동(극동)에서 강제이주된 고려인들이 1937년 10월 9일부터 1938년 4월 10일까지 토굴을 짓고 살았던 정착지이다.'
하지만 고려인들은 절망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강인한 생명력과 지혜로 황무지를 새로운 삶의 터전으로 일구어 나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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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자흐스탄에 세워진 비석 |
• 농업: 황무지를 옥토로 바꾸다
맨손으로 내쫓겼지만, 그들의 손에는 연해주에서부터 이어온 뛰어난 벼농사 기술이 있었습니다.
고려인들은 척박한 땅에 수로를 내고 벼를 심어, 마침내 황무지를 풍요로운 논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들이 세운 집단농장(콜호즈)은 소련 전역에 쌀을 공급할 정도로 성장하며 경제적 기반을 다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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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주 치르치크로 강제이주된 고려인들 |
• 문화: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노력
소련 정부의 탄압으로 모국어를 잃어가는 상황 속에서도, 고려인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민족의 정체성을 지켜나갔습니다.
현지 재료를 활용해 우리 고유의 맛을 창조적으로 재현해냈고, 문학과 예술을 통해 민족의 혼을 이어갔습니다.
강제이주와 함께 중앙아시아로 옮겨온 고려극장과 한글 신문 '선봉(이후 '레닌기치'로 재창간)'은 낯선 땅에서 우리말과 문화를 지키는 소중한 구심점 역할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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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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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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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코브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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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의 주재료인 배추를 구하기 어려워, 흔했던 당근을 채 썰어 만든
'고려인식 당근 김치'입니다. 현재는 구소련 전역에서 사랑받는 음식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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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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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잔치국수와 비슷하지만, 다양한 고명을 '추미'라고 부르며
풍성하게 올려 먹는 것이 특징입니다. 중앙아시아 사람들도
'카레이스키 국시'라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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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수십 년의 세월이 흘러, 고려인들은 중앙아시아 사회에 단단히 뿌리내렸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속에는 늘 '조국'에 대한 그리움이 남아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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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즈베키스탄 전통시장의 고려인 상인 |
5. 끝나지 않은 이야기: 나는 누구인가?
소련이 붕괴된 후, 수많은 고려인 후손들이 '할아버지의 나라' 한국으로 돌아오기 시작했습니다.
현재 약 10만 명이 넘는 고려인들이 한국에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수십 년 만에 돌아온 조국은 그들에게 또 다른 낯선 땅이었습니다.
1. 언어의 장벽
대부분 러시아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고려인 후손들에게 한국어는 너무나 어려운 외국어입니다.
러시아에서 태어나 7살에 한국에 온 폴리나 학생은 "선생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어 수학, 과학 시간이 암호 같았다"고 말합니다.
언어의 장벽은 학교생활과 사회 적응에 큰 걸림돌이 되고 있습니다.
2. 낯선 시선과 제도
법적으로 고려인들은 '동포'가 아닌 '외국인'으로 분류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전에 조국을 떠나야 했던 역사 때문에 '재외동포법'의 완전한 혜택을 받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각종 교육 및 복지 지원에서 소외되고, 사회적 차별과 편견에 부딪히기도 합니다.
한 고려인은 이렇게 한탄합니다.
"우리는 거기서도 남이고 한국에 와서도 남이다."
이러한 현실은 고려인 후손들에게 "나는 누구인가?"라는 깊은 정체성의 고민을 안겨주었습니다.
그들의 복잡한 마음은 카자흐스탄의 한 고려인 시인이 겪었던 일화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나라 없이 떠도는 쿠르드인 친구가 그에게 말했습니다.
"너는 행복한 사람이다. 너는 고향이 두 개 있는데 한국과 카자흐스탄. 나는 하나도 없다."
그 말을 듣고 시인은 이렇게 되뇌었습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나도 고향이 두 개예요."
강제로 고향을 떠나야 했고, 수십 년 만에 돌아온 조국에서도 이방인으로 살아가야 하는 고려인들의 역사는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이야기
고려인 강제이주의 역사는 단순히 한민족의 비극적인 과거사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이는 국가 폭력에 의해 삶의 터전을 잃고 인권을 탄압당했던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와 맞닿아 있는 보편적인 인류사의 일부입니다.
어느덧 광복 80주년을 맞이했습니다.
우리가 이 아픈 역사를 진정으로 기억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차가운 열차에 실려야 했던 그들의 고통에 공감하고, 오늘날 우리 곁으로 돌아온 고려인들을 따뜻한 이웃으로 맞이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끝나지 않은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역사를 기억하고 미래를 여는 진정한 방법일 것입니다.
이 글은 1937년 고려인 강제 이주와 중앙아시아 정착 과정을 다룬 역사 에세이로, 신뢰 가능한 연구·기록·증언을 바탕으로 하되 독자의 몰입을 위해 일부 장면 구성과 표현은 전형적인 사례를 종합한 서사적 재구성입니다.
인물·숫자·연도·지명은 현재 공개된 자료를 기준으로 정리했지만, 학계와 생존자 증언에 따라 해석이 갈리는 부분은 하나의 관점을 중심으로 소개한 것입니다.
더 깊이 있는 이해를 원하신다면 고려인 강제 이주 관련 연구서와 구술 기록을 함께 참고해 주세요.
Koryo-saram, ethnic Koreans in the former Soviet Union, migrated to Russia’s Far East in the late 19th century seeking land and later became a core base for Korea’s independence movement.
In 1937 Stalin forcibly deported about 170,000 of them by cattle train to Central Asia; many died on the journey.
Survivors turned barren steppe into farmland, preserved elements of Korean culture, and now live between two homelands, facing language, legal and identity challenges in today’s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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