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민정음에 반기 든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 - 세종 시대 원칙주의 선비의 명과 암 (Choi Man-ri)


바른 세상을 꿈꾼 선비, 세종에게 '아니되옵니다'를 외치다


1. 위대한 군주에게 '아니오'라고 말한 남자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주, 백성을 사랑한 성군(聖君)으로 칭송받는 세종대왕. 

하지만 그 위대한 군주의 심장과도 같았던 집현전, 그곳의 수장이 세종의 가장 빛나는 업적에 비수를 꽂는 상소를 올리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는 단순한 반대자가 아니었습니다. 

당대 최고의 학문 기관이었던 집현전의 실질적인 수장이자, 평생을 청렴하게 살아 조선왕조 500여 년간 단 217명뿐이었던 청백리(淸白吏) 중 한 명으로 꼽히던 뛰어난 관료였습니다. 

그의 이름은 최만리(崔萬理), 세종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왕의 뜻에 '아니되옵니다'를 외쳤던 강직한 선비의 이야기입니다.


2. 조선 최고의 엘리트, 집현전의 학자 최만리

천재의 등장

1398년, '해동공자'라 불린 대학자 최충(崔沖)의 11대손으로 태어난 최만리는 명문가의 후손답게 어릴 적부터 학문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습니다. 

1419년(세종 1년), 그는 생원 신분으로 문과(文科) 시험에서 을과 3등이라는 우수한 성적으로 급제하며 화려하게 관직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불과 1년 뒤인 1420년, 세종이 국가의 미래를 이끌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신설한 집현전의 박사(博士)로 발탁됩니다. 

그의 빛나는 재능을 세종이 일찍부터 알아본 것입니다.


학문의 전당, 집현전

집현전은 단순한 연구 기관이 아니었습니다. 

세종이 꿈꾸던 유교적 이상 국가의 기틀, 즉 ‘예악문물(禮樂文物)’을 정비하기 위한 조선의 핵심 소프트웨어 개발실이었습니다. 

이곳에서 최만리와 같은 젊은 엘리트들은 국가의 모든 제도를 설계하고 통치 이념의 근간을 다지는 막중한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그들은 단순한 학자가 아니라, 새로운 국가의 설계자들이었던 셈입니다. 

세종은 이들에게 이렇게 당부했습니다.


"專業學術, 期以終身." (학술을 전업으로 하여 종신토록 하기를 기약하라.)


왕의 전폭적인 신뢰 속에서, 최만리는 평생을 바쳐 학문을 연마하고 국가의 근간을 세우는 데 몰두했습니다.


멈추지 않는 정진

이미 집현전의 핵심 인재로 인정받고 있던 1427년, 최만리는 교리(校理)라는 관직에 있으면서도 문과 중시(重試)에 다시 응시합니다. 

중시는 현직 관료들이 실력을 겨루는 특별 시험으로, 그는 여기서 또다시 을과 2등 1위라는 최상위권의 성적으로 급제합니다. 

이는 그의 학문에 대한 끝없는 열정과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능력을 보여주는 일화입니다.


집현전 학자 최만리


3. 세종의 오른팔, 부제학이 되다

집현전 박사(정7품)로 시작한 최만리는 약 20여 년간 한결같이 집현전을 지켰습니다. 

그의 성실함과 능력은 세종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고, 마침내 정3품 부제학(副提學)의 자리에 오릅니다. 

부제학은 명예직인 대제학(주로 삼정승이 겸직)을 제외하면 집현전의 모든 연구와 행정을 총괄하는 실질적인 책임자였습니다.


그는 학자로서뿐만 아니라, 훗날 문종이 되는 세자의 스승으로서 왕실의 신임도 얻었습니다. 

훗날 세조가 실록에서 직접 회상했듯이, 문종과 세조는 최만리를 떠올리며 "하나라도 조그마한 과실이 있으면 문득 간하여 마지않았다"고 말하며 그의 성실함과 강직함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이는 그가 단순한 학자를 넘어, 왕실의 미래를 걱정하는 충신이었음을 보여줍니다.


4. 임금과 신하, 운명을 가른 새 글자 '언문'

세종 26년(1444년) 2월, 역사의 흐름을 바꾼 사건이 일어납니다. 

집현전의 수장 최만리가 정창손, 하위지 등 동료 학자들과 함께 훈민정음 창제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린 것입니다. 

그들은 세종의 가장 위대한 업적에 정면으로 맞섰습니다.

하지만 그들 역시 새 글자의 위대함을 몰랐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상소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신들이 엎디어 보옵건대, 언문(諺文)을 제작하심이 지극히 신묘하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지혜를 운전하심이 천고에 뛰어나시오나, 신들의 구구한 관견(管見)은 오히려 의심할만 한 것이 있사와..."


그들조차 '천고에 뛰어난 신묘한 창조'라고 인정할 만큼 훈민정음은 완벽한 글자였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왜 목숨을 걸고 반대해야만 했을까요?


5. 어전에서의 격돌: 세종과 최만리의 대화

상소문을 받아 든 세종은 최만리를 비롯한 학자들을 어전으로 불렀습니다. 

왕과 신하의 팽팽한 논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최만리: "첫째, 어찌 중화(中華)를 버리려 하시나이까. 우리 조선은 대국을 섬겨왔는데, 중국과 다른 문자를 만드는 것은 사대(事大)의 도리에 어긋나옵니다. 만일 중국에서 이를 비난하면 어찌 부끄럽지 않겠사옵니까?"

최만리: "둘째, 이는 오랑캐의 일이옵니다. 몽골, 여진, 일본만이 제 글자가 있을 뿐입니다. 중화의 문물을 따르던 우리가 스스로 오랑캐와 같아지려는 것이니, 이는 좋은 향을 버리고 쇠똥을 취하는 것과 같사옵니다."

최만리: "셋째, 학문에 해가 될 것이옵니다. 이두(吏讀)는 한자를 익히는 데 도움이 되나, 언문은 학문을 저해할 뿐입니다. 수십 년 뒤에는 문자를 아는 자가 반드시 줄어들 것이옵니다."

최만리: "마지막으로, 동궁(東宮)께서 여기에 힘을 쏟는 것은 학문에 손실이옵니다. 세자께서는 성리학에 잠심하셔야 하온데, 어찌 급하지 않은 일에 시간을 허비하시나이까?"


최만리의 조목조목 이어지는 반대에 세종은 크게 노했습니다.


세종: "너희들이 이르기를, 음을 사용하고 글자를 합한 것이 모두 옛 글에 위반된다 하였는데, 설총의 이두도 음이 다르지 않으냐? 너희들이 설총은 옳다 하면서 임금이 하는 일은 그르다 하는 것은 어째서이냐?"

세종: "또 네가 운서(韻書)를 아느냐? 사성칠음에 자모가 몇이나 있는지 아느냐? 만일 내가 그 운서를 바로잡지 않으면 누가 이를 바로잡을 것이냐!"

세종: "그리고 내가 늙어서 국가의 서무를 세자에게 맡겼거늘, 어찌 언문 같은 일에 참여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너희들이 시종하는 신하로서 내 뜻을 알면서도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이 옳단 말인가?"


세종의 호통에도 최만리는 굽히지 않았습니다.


최만리: "동궁께서 공무에 참여하시는 것은 마땅하오나, 급하지 않은 일을 무엇 때문에 시간을 허비하며 심려하시옵니까?"


결국 세종의 분노가 폭발했습니다.


세종: "내가 너희들을 부른 것은 죄를 주려 함이 아니었으나, 사리를 돌아보지 않고 말을 바꾸어 대답하니, 너희들의 죄는 벗기 어렵다!"


세종과 최만리의 대화는 단순한 의견 차이가 아니었습니다. 

세종의 반박은 논리보다는 권위에 호소하는 측면이 강했습니다. 

"네가 운서를 아느냐?"는 질문은 학문적 토론이라기보다 군주의 질책에 가까웠습니다. 

특히 세종은 최만리의 첫 번째 주장, 즉 '사대의 도리'에 대해서는 아예 반박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당시 명나라를 섬기는 사대(事大)는 조선의 외교적, 이념적 근간이었기에 왕이라도 정면으로 부정할 수 없는 대원칙이었던 것입니다. 

이는 최만리의 우려가 당대의 시각에서는 지극히 합리적이고 당연한 것이었음을 보여줍니다.


6. 소신을 지킨 학자의 마지막

세종의 진노는 최만리와 학자들을 의금부 옥에 갇히게 했습니다. 

하지만 세종은 다음 날 그들을 모두 석방했습니다. 

평생을 나라에 헌신한 늙은 신하의 충심을 끝내 외면할 수는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임금의 뜻을 꺾지 못한 최만리는 스스로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이듬해인 1445년, 조용히 세상을 떠났습니다.


후대 사람들은 그를 '사대주의에 찌든 꼴통 선비'라고 비난합니다. 

한글이라는 위대한 유산을 거부한 그의 선택을 용납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그를 '자신이 믿었던 세계 질서와 학문의 체계가 무너질 것을 우려한 원칙주의자'로 재해석하는 시각이 힘을 얻고 있습니다. 

그에게 한문(漢文)은 단순히 글자가 아니었습니다. 

조선을 중화 중심의 세련된 문명 세계와 연결하는 운영체제(OS) 그 자체였습니다. 

한글 창제는 수백 년간 지켜온 문명의 가치 체계를 뒤흔드는 거대한 변혁이었고, 그는 자신이 쌓아 올린 세계의 붕괴를 막고자 했던 것입니다.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한 번쯤 생각해볼 만한 질문이 있습니다. 

만약 당신이 최만리였다면, 시대의 거대한 변화 앞에서 어떤 선택을 했을까요?


이 글은 조선 전기 인물 최만리와 세종, 훈민정음 창제 과정을 다룬 사료와 연구 성과를 기본으로 하되, 당시의 대화·심리·장면 묘사는 이해를 돕기 위한 소설적 재구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실존 인물의 선택과 갈등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가능성 가운데 하나일 뿐이니, ‘사실의 뼈대 위에 상상으로 살을 보탠 역사 서사’로 가볍게 감상해 주세요.


This essay follows Choi Man-ri, a brilliant scholar and head of King Sejong’s Jiphyeonjeon, who dared to oppose the creation of Hangul

It traces his rise as a trusted, incorruptible official, his principled memorial against the new script on grounds of Confucian order and Sino-centric norms, his clash with Sejong, resignation, and later reevaluation as a rigid yet sincere guardian of his world.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