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철과 진흙의 요람
제1부: 낭만의 종말, 불꽃이 튀다
1. 시대적 배경: 꺼지지 않는 불씨들
1914년 여름, 유럽 대륙은 벨 에포크 (Belle Époque, 아름다운 시절)의 마지막 낭만에 취해 있었다.
겉으로는 화려한 궁정과 급속한 산업 발전의 빛이 넘실거렸지만, 그 이면에는 수십 년간 쌓여온 강철 같은 경쟁과 증오가 도사리고 있었다.
19세기 후반부터 유럽은 군비 경쟁과 제국주의 열풍에 휩싸였다.
특히 1870년대 독일 통일 (German Unification) 이후, 유럽의 세력 균형은 근본적으로 흔들렸다.
독일은 산업 혁명을 바탕으로 1910년경에는 이미 영국을 능가하는 경제력과 인구(6,700만 명)를 갖추며 유럽 최강국으로 부상했고, 이는 프랑스(4,000만 명)와 영국(4,600만 명) 모두에게 견제 대상이었다.
이로 인해 유럽은 삼국동맹 (Triple Alliance: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이탈리아)과 삼국협상 (Triple Entente: 영국, 프랑스, 러시아)이라는 복잡한 동맹 체제로 고착화되었으며, 한 나라의 작은 분쟁이 전체 전쟁으로 확전될 수 있는 위태로운 상태에 놓였다.
이러한 긴장을 폭발시킨 것은 민족주의 (Nationalism)였다.
특히 발칸 반도 (Balkan Peninsula, 오스만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러시아의 이해관계가 교차하던 유럽의 '화약고')는 범슬라브주의를 내세우는 러시아 제국과 이를 견제하려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사이에 놓인 다툼의 중심지였다.
세르비아 왕국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Bosnia and Herzegovina, 슬라브계 민족이 다수 거주하던 지역)를 합병 (1908년)한 것에 대해 극렬한 적대감을 품고 있었다.
2. 사라예보의 비극과 백지 수표
1914년 6월 28일, 운명의 날이 밝았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수도) 사라예보 (Sarajevo) 시가지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Franz Ferdinand, 합스부르크 왕가의 계승자)과 그의 아내 조피 초테크 (Sophie Chotek)가 방문하는 행렬로 분주했다.
그들 부부는 곧 세르비아 민족주의 조직 '검은 손'과 연계된 청년 가브릴로 프린치프 (Gavrilo Princip, 세르비아계 청년 민족주의자)의 총탄에 암살당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에서는 황태자 암살에 격분한 강경파들, 특히 외무장관 레오폴트 폰 베르히톨트 백작 (Leopold von Berchtold)과 육군 사령관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백작 (Franz Conrad von Hötzendorf)이 세르비아에 대한 '예방 전쟁'을 벌여 발칸반도에서의 영향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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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라예보 사건 |
오스트리아는 움직이기 전에 동맹국인 독일의 지원을 확인하고자 했다.
7월 5일, 독일 제국의 빌헬름 2세 (Wilhelm II, 독일 카이저)는 오스트리아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를 약속하는 이른바 ‘백지 수표’ (Blank Cheque)를 건네주었다.
독일 수상 베트만-홀벡 (Theobald von Bethmann Hollweg)은 이 지원이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대해 신속한 보복전(국지전)을 벌여 러시아가 개입할 여지를 없앨 것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독일 지도부의 구상은 곧 엄청난 과실로 드러났다.
독일에 대한 강한 비판이 제기되는 부분은 바로 이 백지 수표의 제공이다.
독일이 오스트리아의 모험주의에 사실상 동조함으로써, 국지적인 발칸 분쟁이 세계대전으로 비화되는 길을 열었기 때문이다.
7월 23일,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에 ‘7월 최후통첩’을 보냈다.
이 통첩에는 오스트리아 관리가 세르비아 조사에 직접 참여해야 한다는 등, 세르비아의 주권을 침해하는 조건이 포함되어 있었다.
오스트리아의 속셈은 세르비아가 이를 거부하여 전쟁 명분을 얻는 것이었다.
그러나 평화를 원했던 세르비아는 10개 요구 사항 중 9개를 수용하고 나머지 1개도 부분적으로 수락하는 굴욕적인 답변을 보냈다.
그럼에도 오스트리아는 이를 '불충분한 답변'으로 규정하고, 7월 28일 세르비아에 선전포고하며 침공을 개시했다.
이로써 제1차 세계 대전의 서막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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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상황을 요약한 미국의 만평 |
3. 전면전으로의 도미노: 7월 위기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를 침공하자, 러시아는 범슬라브주의 (Pan-Slavism)를 내세우며 즉시 세르비아의 후견국으로서 개입했다.
7월 29일, 러시아 제국은 총동원령을 발동했다.
러시아의 총동원령은 독일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독일 군부에게 러시아의 동원은 직접적인 위협 인식을 증대시키는 군사적 조치였다.
수상 베트만-홀벡은 국지전 구상을 포기하고 중재를 시도했으나, 이미 전열을 갖추기 시작한 군부를 막을 수 없었다.
"폐하, 러시아가 동원을 시작했습니다. 우리 군사 계획은 양면 전쟁을 전제로 합니다. 만약 우리가 즉각 대응하지 않는다면, 러시아군은 우리보다 먼저 서부 국경에 도달할 것입니다!" (독일 육군 참모총장 소 몰트케, Helmuth von Moltke the Younger)
"하지만 베트만은 영국과 협상 중이지 않나! 전쟁의 확산을 막아야 한다!" (카이저 빌헬름 2세)
"더 이상 외교가 통할 시기는 지났습니다. 모든 것은 이미 계획대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전쟁이 단기간에 끝날 유일한 방법은 슐리펜 계획뿐입니다." (소 몰트케)
슐리펜 계획 (Schlieffen Plan, 독일의 양면 전쟁 대비 작전 계획)은 러시아가 동원하는 6주 동안 프랑스를 굴복시키기 위해 프랑스-벨기에 국경의 취약점을 빠르게 돌파하도록 설계되었다.
이 계획은 중립국인 벨기에 (Belgium)를 침공하는 것을 전제했는데, 이는 외교적 유연성을 완전히 배제한 경직된 군사 계획의 과실이었다.
8월 1일 독일은 러시아에 선전포고했고, 8월 3일에는 프랑스에 선전포고하며 벨기에를 침공했다.
영국은 본래 중립을 지키려 했으나, 독일이 벨기에의 중립을 무시하고 침략하자 8월 4일 독일에 선전포고하며 참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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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빌헬름 2세 |
4. 서부 전선: 기관총과 붉은 바지
(프랑스군 소속, 26세. 파리 근교 출신으로 동원된 예비 보병.) 장 뒤부아는 독일이 선전포고하자마자 애국심과 낭만적인 열정으로 전선에 달려갔다.
젊은이들은 이 전쟁이 3개월 안에 끝날 것이라 낙관했다.
"친구들, 걱정 말게! 우리는 크리스마스 전에 파리로 돌아와 영웅 대접을 받을 걸세. 독일군은 구식 대열 보병 전술을 고수할 걸세. 우리는 용감한 돌격(l'attaque à outrance)만 감행하면 된다!" (장 뒤부아)
장 뒤부아와 그의 연대는 짙은 파란색 코트와 붉은 바지 (당시 프랑스군의 구형 군복으로 시인성이 높아 쉽게 표적이 되었음)를 입고 독일 국경 쪽으로 행진했다.
그들의 사기는 높았으나, 곧 독일군의 기관총 (Machine Gun) 앞에 무너질 운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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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원병 열풍 |
독일군 측에서는 (독일군 보병, 23세, 열렬한 민족주의 청년) 프리드리히 '프리츠' 뮐러가 벨기에 국경을 넘고 있었다.
그의 연대는 슐리펜 계획에 따라 엄청난 속도로 프랑스 수도 파리를 향해 남서쪽으로 진격했다.
프리츠의 부대는 벨기에의 리에주 요새 (Liège, 벨기에 국경 요새) 앞에서 처음으로 현대전의 진정한 맛을 보았다.
벨기에 방어군은 외곽 요새에서 항전했고, 독일군은 거포 (Heavy Artillery)를 동원해 요새를 파괴했다.
"이건 전쟁이 아니야. 이건 학살이지! 리에주에서 보았던 그 끔찍한 포성은 인간의 소리가 아니었어. 놈들은 대포를 재조준할 필요도 없이 분당 7발을 쏟아냈지." (프리츠 뮐러, 그의 전우에게 속삭이며)
독일군의 신형 대포는 반동 흡수 장치 덕분에 기존 대포에 비해 7배 이상 빠른 연사가 가능했으며, 이들은 마른 전투 (Battle of the Marne)에서 단 4분 만에 2,000명의 프랑스군을 사살하기도 했다.
기관총과 신형 포병 화력의 발달은 이미 전열 보병 시대의 전술을 무력화시켰지만, 유럽 군부는 러일 전쟁 등에서 얻은 교훈을 철저히 무시한 채 여전히 공격 만능주의 (Offensive à outrance, 맹렬한 공격만이 승리를 가져온다는 교리)에 빠져 있었다.
이는 수많은 청년 장병들을 무의미한 희생으로 내몰았던 고위 지휘관들의 결정적인 과실이자 비판 대상이다.
5. 마른의 기적과 참호의 시작
9월 초, 독일군은 파리에서 불과 50km 떨어진 지점까지 진격했다.
프랑스 정부는 이미 보르도 (Bordeaux)로 피난을 간 상황이었다.
파리 함락이 눈앞에 다가왔을 때, 프랑스군 총사령관 조제프 조프르 (Joseph Joffre, 프랑스군 총사령관)는 반격 작전을 명령했다.
조프르는 독일군 주력이 벨기에 방면 (슐리펜 계획의 우익)에 집중된 것을 간파하고, 예비 병력을 파리 방면으로 이동시켰다.
이 병력 수송에는 파리 시내의 택시 (Parisian Taxis)까지 징발되었으며, 이 택시들은 병력을 전선으로 실어 나르는 역사적인 임무를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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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력을 수송하는 택시들 |
9월 6일부터 9일까지 벌어진 제1차 마른 전투 (First Battle of the Marne)에서 영국-프랑스 연합군은 독일의 공세를 저지하는 데 성공했다.
독일군은 엔 강 (Aisne River)으로 후퇴하며 프랑스 수도를 단기간에 함락시키려는 계획이 사실상 무산되었다.
프리츠 뮐러는 후퇴 명령에 충격을 받았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우리는 파리 목전까지 왔는데... 누가 우리 등에 칼을 꽂은 건가?" (프리츠 뮐러, 패배감에 휩싸여)
슐리펜 계획의 실패는 독일군 총참모장 소 몰트케의 해임으로 이어졌다.
몰트케는 슐리펜 계획에 두 차례나 간섭하여 서부 전선의 병력을 약화시킨 실책을 저질렀으며, 마른 전투의 실패는 전쟁 전체의 향방을 결정하는 중요한 분수령이 되었다.
마른 전투 이후, 양측은 상대의 측면을 포위하려는 일련의 기동전, 즉 ‘바다로의 경주’ (Race to the Sea)를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결국 독일군은 점령지의 유지와 방어를 위해, 연합군은 적의 진격 저지와 역공을 위해 땅을 파기 시작했다.
이것이 참호전 (Trench Warfare)의 시작이었다.
프리츠 뮐러는 벨기에 국경부터 스위스 국경까지 이어지는 긴 방어선을 파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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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공기에서 촬영된 전선의 참호들 |
장 뒤부아 역시 반대편에서 진흙과 흙을 파내고 있었다.
"이제 기동은 끝났다. 우리는 이 땅에 갇힌 채, 서로를 소모시키기 위한 거대한 함정을 만들고 있어. 끝이 없는 싸움이 될 것이다." (장 뒤부아, 체념하며)
양측은 참호를 사이에 두고 가진 모든 자원을 아낌없이 쏟아 부었고, 이내 전쟁은 전례 없는 물량전과 소모전의 양상으로 바뀌었다.
이 참호선은 앞으로 4년간 유럽 서부 전선 전체에 걸쳐 이어졌으며, 그곳은 곧 인외마경의 생지옥으로 변모하게 된다.
제2부: 진흙 구덩이의 사육제와 화학의 시대
1. 서부 전선의 교착: 물량전과 소모전
1914년 가을, 마른 전투 (First Battle of the Marne)의 실패 이후, 독일군은 점령지를 유지하고 방어하기 위해, 영국과 프랑스(협상국)군은 적의 진격을 저지하고 역공의 기회를 엿보기 위해 땅을 파기 시작했다.
서부 전선은 벨기에 국경에서 스위스 접경까지 이어지는 긴 참호선 (Trench line)으로 고착되었고, 이는 전례를 찾기 어려운 소모전과 장기전의 특성을 보였다.
(프랑스군 보병) 장 뒤부아는 이제 흙투성이가 된 그의 붉은 바지 (프랑스군 구형 군복)를 내려다보았다.
1년 전의 낭만적인 애국주의적 열정은 신무기들의 공포에 의해 치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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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른전투의 참호 |
참호전의 특징은 물량전이었다.
양 진영은 근대식 교육과 대량생산체제에 힘입어 끊임없이 군인과 물자를 전선에 쏟아 부었다.
하지만 참호가 양측에 형성되면서, 이는 상대를 소모시키는 수단인 동시에 자신마저 끊임없이 소모시킬 수밖에 없는 의미 없는 싸움이 되었다.
참호의 확대는 양측 모두에게 앞으로 나가지도 뒤로 물러서지도 못하는 진퇴양난의 딜레마를 안겼다.
(독일군 보병) 프리드리히 '프리츠' 뮐러가 서부 전선의 참호 안에서 쥐떼를 쫓아냈다.
참호 안의 환경은 추위, 적에 대한 공포, 전염병을 견뎌야 하는 생지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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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체를 파먹는 거대한 쥐들 |
프리츠 뮐러: "우리는 진흙 속에 갇혀 있네. 끝없는 포격이 이어진 뒤, 놈들이 돌격해오면 기관총(Machine Gun)으로 갈아버리고, 우리가 돌격하면 우리가 갈려나가지. 파리 목전까지 갔던 그 기동성은 어디로 갔단 말이냐?" (프리츠 뮐러, 그의 전우에게 진흙으로 덮인 총을 닦으며)
이처럼 참호전이 발생한 근본적인 이유는 화력(기관총, 개선된 대포)이 기동(보병 돌격)을 상대로 압도적인 우위를 누렸기 때문이다.
당시 지휘관들, 특히 영국과 프랑스의 지휘관들은 공격 만능주의 (Offensive à outrance 돌격! 앞으로!)라는 구시대적 교리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들은 러일 전쟁이나 보어 전쟁에서 얻은 신형 병기의 교훈을 철저하게 무시했다.
그 결과, 병사들은 '자살 행위'라고 불릴 정도로 황폐화된 무인 지대 (No Man's Land)를 가로질러 돌격해야 했고, 이는 기관총 앞에서 벌집이 되는 비일비재한 일이었다.
장교들의 사망률 역시 일반 사병(1/8 정도)보다 훨씬 높은 1/5 가량이었다.
이는 지휘관들의 판단 미스와 경직된 교리 고수라는 명백한 과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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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Offensive à outrance 돌격! 앞으로! |
2. 화학의 시대: 이프르의 악몽
참호선이 완전히 교착 상태에 빠지자, 양측은 상대의 참호를 무력화하기 위해 치열한 신기술과 신무기 경쟁을 벌였다.
그 중 가장 끔찍하고 비인간적인 형태로 등장한 것이 바로 독가스 (Chemical Warfare)였다.
1915년 4월 22일, 벨기에 이프르 (Ypres) 전선.
(독일군 화학자, 노벨화학상 수상자) 프리츠 하버 (Fritz Haber)가 이끄는 독일군 연구진은 역사상 처음으로 대량살상무기를 전장에 투입했다.
새벽 5시, 독일군 진영에서 5,730개의 가스통에 담긴 150톤의 염소 가스 (Chlorine Gas)가 바람을 타고 연합군 쪽으로 흘러갔다.
염소 가스는 독한 냄새를 풍기는 황갈색으로, 공기보다 2.5배 무거워 참호 속으로 치명적으로 스며들었다.
장 뒤부아의 전우, 마르셀: "저, 저것 봐! 녹황색 구름이 우리 쪽으로 온다! 물에 젖은 천으로 입을 막아! (콜록이며) 숨을 쉴 수가 없어! 내 폐가 타들어 가는 것 같아! 신이시여, 이건 전쟁이 아니야! 이건 지옥이다!" (마르셀, 얼굴이 녹황색으로 변하며 피를 토하고 쓰러진다.)
이날 하루 동안 연합군 1만 5천 명이 독가스에 중독되었고, 5천 명이 숨졌다.
독가스 공격을 받은 프랑스 방어군은 숨이 막히게 하고 눈이 멀게 하는 가스 앞에 무더기로 쓰러졌지만, 독일군은 그 이점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협상국 역시 포스겐 가스를 살포하며 보복했고, 이후 양측은 머스터드 가스 등 더 효과적인 독가스를 개발했다.
종전까지 9만 명이 화학무기에 희생되었고, 130만 명이 부상을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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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차 대전기 방독면을 쓴 군견과 병사 |
독가스의 등장은 화학 공업의 발전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하버는 암모니아 합성 공법 (Haber Process)을 개발하여 농업 생산량 증대에 기여했지만, 이 기술은 모든 폭약의 핵심 성분인 질소를 대량으로 고정할 수 있게 했으며, 독일이 수년간 전쟁을 지속할 수 있는 최소한의 식량과 폭발물을 확보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하버는 이 공로로 1918년 노벨 화학상을 받았으나, "평화시에는 인류에, 전시에는 조국에 봉사한다"는 신념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으로서 독가스 개발을 주도했다는 비난에 시달렸으며, 그의 부인 클라라 임머바르 (Clara Immerwahr, 역시 화학자이자 유대인)는 독가스 사용에 반대하며 1915년 5월 1일 자살하는 비극이 일어났다.
독가스를 다루는 최전방의 여성 노동자들(주로 포탄에 폭약을 채워 넣는 일)은 폭약의 화학물질이 손과 얼굴을 노랗게 물들였기 때문에 '카나리아' (Canary)라고 불렸다.
이 비극적인 별명은 전쟁 중 위험에 노출된 여성 노동자들의 상징이 되었다.
3. 지옥의 대격돌: 베르됭과 솜 (1916)
1916년은 서부 전선에서 가장 피의 대가를 치른 해였다.
독일군 총사령관 에리히 폰 팔켄하인 (Erich von Falkenhayn)은 프랑스군을 전멸시키기 위해 베르됭 (Verdun, 프랑스 로렌 지역의 요새 도시)에 대규모 공격을 개시했다.
베르됭 전투 (Battle of Verdun, 1916년 2월~12월): 독일군의 목적은 프랑스군이 요새를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병력을 끌어 모으게 한 뒤, 그 병력을 소모전으로 갈아 넣는 것이었다.
독일 포병대는 9시간 동안 쉬지 않고 포격을 퍼부어 프랑스군의 1차 방어선을 완전히 무너뜨렸다.
프랑스군 지휘관 앙리 페탱 (Henri Philippe Pétain) 장군은 요새 사수를 결심하고 '한 치의 땅도 내주지 말라'고 명령했다.
프랑스군은 보급로를 확보하기 위해 3천 대의 차량 수송대를 동원하는 필사적인 보급 작전을 벌였고, 결국 독일의 진격 속도를 늦추고 요새를 사수하는 데 성공했다.
이 전투는 100만에 가까운 사상자를 기록했으며, 베르됭은 프랑스의 의지와 희생의 상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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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르됭에서 폭발하는 수류탄 |
솜 전투 (Battle of the Somme, 1916년 7월~11월): 베르됭의 압박을 덜기 위해 영국-프랑스 연합군은 솜강 지역에서 대규모 공세를 시작했다.
7월 1일 공격 첫날, 영국 육군은 역사상 가장 큰 사상자를 기록하며 하루 만에 19,240명이 사망했고, 총 사상자는 75,470명에 달했다.
이 사상자의 대부분은 오비예 주위에 포진한 독일군 기관총 사수들에게 몰살당했으며, 독일군 수비대는 300명 미만의 병력을 잃었을 뿐이었다.
전투 개시 2주 차까지 영국군은 매일 1개 사단 규모인 1만 명의 병력을 잃고 있었다.
솜 전투는 또한 탱크 (Tank)가 세계 최초로 대량 운용된 전투로 기록되지만, 당시 탱크는 느리고 기계적 신뢰도가 낮았으며 조작이 어려워 초기에는 참호전 타개에 큰 역할을 하지 못했다.
이 전투는 연합군 지휘관들이 새로운 전쟁에 전혀 적응하지 못했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인명 피해의 극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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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솜 전투 기록의 병사 행군 장면 |
4. 후방의 총력전과 사회적 전환
전쟁은 전선뿐 아니라 후방의 사회 전체를 동원하는 총력전 (Total War)의 양상으로 바뀌었다.
전쟁 비용은 가히 천문학적이었다.
독일은 전쟁 전 예산의 50년분, 영국은 38년분, 프랑스는 27년분을 소모했다.
이 비용을 감당하기 위해 주요 참전국들은 일제히 금본위제(화폐가치를 일정한 금에 고정시키는 제도)에서 이탈했고, 국채와 지폐 발행을 남발했다.
독일 제국의 라이히스방크 (Reichsbank, 독일 제국 중앙은행) 총재는 "모두 지폐로 해결 가능하다"는 오판을 내리기도 했다.
이러한 금융 시스템의 파괴는 전후 하이퍼인플레이션의 씨앗이 되었다.
남성들이 전선으로 징집되면서 발생한 인력난을 극복하기 위해 영국 여성들은 선반을 조작하고 트럭 엔진을 정비하는 등 남성의 영역으로 여겨지던 일자리에 대거 진출했다.
런던 인근 울리치 무기공장의 여성 노동자는 전쟁 시작 시 10명에서 종전 무렵 2만 4천 명으로 늘었다.
이들은 독립할 수 있을 정도로 돈을 벌어 사회 활동에 나섰다.
여성들은 전쟁 기간 동안 중대한 공헌을 했고, 이는 견고한 성(性)의 장벽을 허물어뜨리는 역할을 했다.
이 공헌에 대한 보상으로, 1918년 영국에서는 30세 이상의 여성에게 최초로 투표권이 부여되었다.
이러한 성 역할의 급격한 변화는 전쟁이 끝난 후에도 많은 기성세대와 남성들에게 문화적 충격과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5. 문화적 충격과 다다이즘의 탄생
전쟁의 가공할 피해는 유럽 문화에 비관적이고 염세적인 분위기를 흐르게 만들었다.
전쟁 초기 산업 혁명 이후 문명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이라 낙관하던 분위기는 신기술을 이용해 서로를 죽이는 전쟁을 통해 박살이 났다.
이러한 묵시론적 파국의 경험 속에서, 젊은 세대는 기성세대의 모든 것을 불신하기 시작했고, 기존의 형식적 권위와 전통적 양식을 거부하는 예술 사조가 등장했다.
이것이 바로 다다이즘 (Dadaism)이다.
다다이즘은 제1차 세계 대전이 한창이던 1915년 스위스 취리히에서 (중립국) 후고 발 (Hugo Ball), 트리스탄 차라 (Tristan Tzara), 장 아르프 (Jean Arp) 등의 작가들이 모여 창설했다.
이 사조는 반-문명, 반-예술을 표방하며, 무정부주의적 성향을 띠었다.
'다다' (Dada)라는 단어는 프랑스어로는 '장난감 목마', 독일어로는 '굿바이', 루마니아어로는 '그래 네가 옳아' 등 명확하고 고정된 의미 없이 국제적인 언어로 통용되며, 정통주의 미학에 반기를 든 자신들의 예술 활동을 적절하게 표현했다.
트리스탄 차라의 1918년 <다다 선언>에는 "모두들 외쳐라. 우리가 완성해야 할 파괴적이며 부정적인 대사업이 있다고! 깨끗하게 소재하고 청소하라! 광기, 공격적이며 완벽한 광기의 상태... 이 세계의 광적 상태가 있은 다음에야 개인의 결백이 입증되는 것이다"라는 구절이 포함되어 있다.
다다이즘은 기술의 합리성과 미래의 낙관을 찬양했던 미래주의 (Futurism)와 달리, 미래와 진보의 개념 자체를 폐기했으며, 이성주의가 전쟁이라는 대량 살상 무기를 낳았다는 충격에 대한 허무주의적 반응이자 반예술의 극단적 형태였다.
장 뒤부아와 프리츠 뮐러가 진흙과 포연 속에서 미쳐갈 때, 후방의 예술가들은 문명의 이성이 낳은 참혹함에 대한 분노를 파괴와 부정을 통해 표출하고 있었다.
이는 기존 질서의 모든 가치가 무너져야 한다는 시대적 절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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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다이즘의 대표적인 작품 |
제3부: 혁명과 미국의 참전, 전선의 대전환
1. 동부 전선의 붕괴: 제국의 약화와 혁명의 불가피성
1916년의 참혹한 소모전을 겪은 후, 전쟁의 축은 동부 전선에서 급격하게 무너지기 시작했다.
러시아 제국은 전쟁이 시작된 1914년부터 이미 엄청난 인적, 경제적 손실을 입고 있었다.
러시아군은 1차 세계 대전에서 총 765만 명의 사상자(사망 170만 명)를 기록했는데, 이는 독일(203만 명 사망) 다음으로 큰 규모였다.
러시아의 국고는 전쟁으로 인해 고갈되었고, 이는 광범위하고 자발적인 식량 폭동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또한, 차르 니콜라이 2세 (Nicholas II, 러시아 제국 황제)가 1915년에 러시아 군대의 최고 사령관 직위를 맡자, 대중은 광대하고 무능한 러시아 참모진의 모든 군사적 실패에 대한 책임을 차르에게 돌리기 시작했다.
한편, 차르가 전선에 있는 동안 국내 정치 상황은 혼란에 빠졌다.
라스푸틴 (Grigori Rasputin, 황후 알렉산드라의 조언자)은 차르 부인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장관들을 마음대로 해임하고 임명할 수 있었고, 그 결과 러시아의 거대한 관료주의가 멈춰 서는 마비 상태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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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 차르 니콜라이 2세 |
1917년 2월, 페트로그라드 (Petrograd, 러시아 수도)에서 대규모 시민 불안과 총파업이 발생하며 2월 혁명이 발발했다.
프리드리히 뮐러(독일군 동부전선 참전 병사): "러시아가 무너지고 있다. 우리는 서부에서 진흙 속에 갇혀 쥐들과 싸우는 동안, 동쪽의 야만인들은 스스로 무너지고 있어. 놈들의 보급은 서부의 프랑스군보다 훨씬 형편없었지. 그들의 차르 (Tsar, 황제)가 전선에서 모든 실패를 짊어져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과실이었지." (프리츠 뮐러, 1917년 초 동부 전선으로 재배치된 후의 일기에서)
결국 차르는 퇴위했고, 온건 사회주의자인 케렌스키 (Alexander Kerensky)가 이끄는 자유주의 임시 정부가 권력을 잡았지만, 이들은 노동자 평의회인 소비에트와 권력을 '공유'해야 하는 이중 권력 상태에 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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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독일의 '무기'와 볼셰비키 혁명
러시아 혁명은 독일에 예상치 못한 전략적 기회를 제공했다.
독일 군부는 서부 전선의 교착 상태를 타개하기 위해 러시아를 전쟁에서 이탈시키는 것이 절실했다.
1917년 3월, 독일은 러시아와 전쟁 중이었고, 임시 정부에 대항하는 쿠데타를 원했다.
독일은 블라디미르 레닌 (Vladimir Lenin, 볼셰비키 지도자)을 "혁명"이라는 일종의 무기로 활용하기로 결정하고, 그가 스위스 (중립국) 망명지에서 페트로그라드로 돌아가는 것을 비밀리에 도왔다.
독일의 이러한 행동은 이념적 동기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전황을 뒤집기 위한 필사적인 필요성에 기반한 것이었다.
레닌은 러시아에 도착하자마자 마르크스주의를 기반으로 한 볼셰비키 이념을 내세워 케렌스키의 권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임시 정부는 전쟁을 계속하려 했으나, 병사들은 이미 전쟁에 지쳐 있었고, 볼셰비키는 '평화, 빵, 토지'를 구호로 내걸며 대중의 지지를 얻었다.
1917년 10월, 레닌과 볼셰비키는 조용하고 고도로 조직된 쿠데타, 즉 10월 혁명을 시작했다.
이들은 임시 정부로부터 모든 주요 기관을 장악하고 공산주의 체제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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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월 혁명 |
볼셰비키 정권은 즉각적으로 평화를 선언하고 독일과의 협상을 시작했다.
1918년 3월, 러시아는 독일에 매우 불리한 조건인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Treaty of Brest-Litovsk)을 체결하고 전쟁에서 이탈했다.
이 조약으로 러시아는 발트 3국,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등을 독일에 넘겨주거나 독립을 허용했으며, 막대한 영토와 자원을 상실했다.
독일은 이로써 서부 전선에 집중할 수 있는 전례 없는 기회를 얻었지만, 이 전략은 단기적인 이득이었을 뿐, 장기적으로는 공산주의라는 거대한 위협을 세계에 풀어놓는 치명적인 과실을 저질렀다는 비판을 받는다.
3. 대서양의 무덤: 무제한 잠수함 작전과 미국의 참전
러시아가 이탈하면서 동맹국 진영에 거대한 희망이 샘솟았지만, 이 시기 또 하나의 결정적인 전환점이 서쪽에서 찾아왔다.
영국과 프랑스는 해상 무역을 통해 미국으로부터 군수 물자와 자금을 공급받고 있었고, 이 보급선은 전쟁 지속의 생명줄이었다.
독일은 이 생명줄을 끊기 위해 1917년 1월 무제한 잠수함 작전 (Unrestricted Submarine Warfare)을 재개했다.
이는 중립국 선박이라도 영국 근해에서 발견되면 경고 없이 격침시키는 정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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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 잠수함 U-9 |
(프랑스 보급 책임자) 에티엔 클레망텔 (Étienne Clémentel, 프랑스 상업부 장관)은 영국의 협력을 이끌어내기 위해 치열한 협상 게임을 벌였다.
당시 프랑스 군수부는 식량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모든 선박을 식량 수송에 빌려준 상황이었고, 파리에는 식량 재고가 하루치만 남은 상황이었다.
(클레망텔, 영국 측 협상 대표에게): "우리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습니다. 포탄은 땅을 파괴하고, 잠수함은 우리의 보급선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협상국이 승리하려면, 자원을 공동으로 사용해야 합니다! 영국이 공익을 위해 선박 통제권을 양보하지 않는다면, 프랑스는 무너질 것이고, 당신들의 철도와 탄전은 독일의 발밑에 놓일 것입니다!" (클레망텔, 런던 협상에서 단호하게 주장하며)
클레망텔은 '협상국의 용적 톤수 통합'을 목표로 했고, 결국 1917년 11월 연합해운의회 (Allied Maritime Transport Council 모든 선박과 화물 운송을 하나의 통일된 전략 아래 조정)를 탄생시켰다.
이 조직은 미국이 합류하여 해상 수송 프로그램을 효율적으로 압축함으로써 미군 병력을 서부 전선으로 수송하는 데 필요한 선박을 확보할 수 있게 했다.
독일 군부가 영국이 6개월 안에 굴복할 것이라고 오판했지만, 영국의 호송선단제 (Convoy System 보급선을 군함이 호위) 도입과 연합해운의회의 성공으로 봉쇄 작전은 견뎌낼 수 있었다.
결국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은 미국을 건드리는 전략적 오판으로 작용했다.
1917년 4월 6일, 미국은 독일에 선전포고하며 참전했다.
미국은 전쟁의 피해를 전혀 보지 않은 채 세계 1위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강력한 장비를 갖춘 군인들을 유럽 전선에 투입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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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의 참전 |
4. 윌슨의 14개조와 민족자결주의의 불꽃
미국의 참전은 단순한 물량 투입 이상의 의미를 가졌다.
1918년 1월 8일,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 (Woodrow Wilson, 미국 대통령)은 14개조 평화 원칙 (Fourteen Points)을 발표했다.
윌슨은 이 선언을 통해 공개 외교 확립, 국제 연맹 (League of Nations) 설립, 그리고 민족자결주의 (Self-determination)를 호소했다.
민족자결주의는 각 민족이 스스로의 정치적 운명을 결정할 권리, 즉 주권을 갖는다는 개념이었다.
윌슨의 이 14개조는 특히 제국주의 열강의 식민지배를 받던 아시아 및 유럽 내 소수 민족들에게 새로운 희망의 불꽃을 던졌다.
이 원칙은 전후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유고슬라비아와 같은 새로운 국가의 탄생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으며, 한국의 3.1 운동을 비롯한 전 세계 민족 해방 운동의 배경 사상 중 하나가 되었다.
하지만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승전국인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 흡수를 막지 못했고, 특히 중동과 발칸 반도에서는 종교 및 민족 분쟁이 얽힌 지역을 인공적으로 묶어 단일 국가로 통합시킴으로써 후대의 분열과 갈등의 씨앗을 뿌리는 과실을 낳았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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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드로 윌슨 대통령 |
5. 중동과 남부 전선의 전개
유럽 전선이 교착된 1917년, 전쟁은 유럽 외곽에서도 치열하게 진행되었다.
오스만 제국 (Ottoman Empire, 동맹국)은 중동 전선에서 영국 및 아랍 반군과 싸우고 있었다.
영국은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는 아랍 민족주의를 선동하며 '혁명 자체를 무기'로 활용했다.
영국은 아랍인들에게 독립을 약속했지만, 1916년 영국과 프랑스가 비밀리에 사이크스-피코 협정 (Sykes-Picot Agreement)을 체결하여 전쟁 후 오스만 제국의 영토를 분할하기로 합의했다.
이는 승전국들이 공개 외교를 요구한 윌슨의 원칙을 무시하고 제국주의적 이해관계를 관철하려 했다는 점에서 강한 비판을 받아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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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E. 로런스와 아랍 반란 |
이탈리아 전선에서는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이 러시아의 지원 없이도 루마니아 (협상국)를 3개월 만에 국토의 절반을 점령하며 건재함을 과시했지만, 이탈리아 전선에서는 이탈리아 왕국군과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이 이손초 강 (Isonzo)을 따라 참호전을 벌이며 치열하게 대치하고 있었다.
1917년 10월,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연합군은 카포레토 전투 (Battle of Caporetto)에서 이탈리아군을 궤멸적인 패배로 몰아넣었다.
이 전투는 이탈리아 군부의 무능함을 여실히 드러냈으며, 이탈리아 사회에 큰 충격과 분노를 안겼고, 이 분노는 훗날 베니토 무솔리니의 파시즘 등장으로 이어지는 과실을 제공했다.
장 뒤부아와 프리츠 뮐러에게 1917년은 길고 혹독한 겨울을 예고하는 해였다.
러시아가 떠났다는 소식은 잠시 희망을 주었지만, 이제 독일군이 동부 전선의 병력을 모조리 서부 전선으로 돌려 최후의 대공세를 준비하고 있다는 소문이 참호선을 타고 돌았다.
그리고 멀리 대서양 너머에서, 미국이라는 압도적인 물량을 가진 새로운 괴물이 상륙하고 있었다.
(장 뒤부아, 그의 참호에서): "프리츠가 동부 전선에서 돌아왔을까? 이제 기관총 (Machine Gun) 앞에 설 병사가 더 늘어나겠군. 하지만 좋다. 양키들 (Yankees, 미군)이 온다지 않나. 물량을 가져온다니, 이 진흙탕 싸움의 끝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전에 우리가 먼저 죽을까?"
1917년 말, 서부 전선은 폭풍 전야의 고요함에 휩싸여 있었다.
독일은 러시아에서 얻은 승기를 바탕으로 모든 것을 걸고 최후의 도박을 준비했고, 연합국은 미국의 합류라는 희망을 붙잡고 참호 속에서 버텨야 했다.
1918년의 대격변은 이제 막 시작되려는 참이었다.
제4부: 최후의 도박, 그리고 강철의 종말
1. 동부 전선의 이동과 독일의 마지막 도박
1918년 초,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Treaty of Brest-Litovsk) 체결로 러시아가 전쟁에서 공식적으로 이탈하자, 독일 제국은 서부 전선에 집중할 수 있는 전례 없는 기회를 잡았다.
독일 최고 사령관 파울 폰 힌덴부르크 (Paul von Hindenburg) 원수와 실질적인 군부 독재자였던 에리히 루덴도르프 (Erich Ludendorff) 장군은 이 병력을 활용하여 춘계 대공세 (Spring Offensive, 또는 루덴도르프 공세)라는 모든 것을 건 최후의 도박을 감행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의 목표는 미국의 대규모 병력과 물량이 유럽에 완전히 도착하여 전력 우위를 점하기 전에, 4년간 이어진 참호전의 교착 상태를 타개하고 연합국을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프리드리히 '프리츠' 뮐러는 러시아에서 돌아와 돌격대 (Stosstruppen, 특수 침투 전술 부대)에 배치되었다.
프리츠 뮐러: "이제야 숨통이 트이는가! 동부의 보병들이 이 진흙탕으로 밀려들어왔다. 루덴도르프 장군께서는 이것이 전쟁을 끝낼 마지막 기회라고 하셨다. 더 이상의 소모전은 없다! 우리는 이 참호를 뒤집어엎고 파리로 진격할 것이다!"
1918년 3월 21일, 독일은 미카엘 작전 (Operation Michael)을 시작으로 춘계 대공세를 개시했다. 독일군은 포격 후 돌격이라는 구식 전술 대신, 경포와 박격포로 짧고 집중적인 공격을 가하고, 잘 훈련된 돌격대가 적의 약점을 침투하여 후방을 교란하는 새로운 전술을 사용했다.
이 공세는 연합국 진영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고, 독일군은 초기에 수십 킬로미터를 진격하며 4년 동안 교착 상태였던 전선을 무너뜨리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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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카엘 작전: 영국군 후퇴, 1918년 3월 |
2. 참호전의 종결과 물량의 역습
하지만 독일군의 초반 성공은 오래가지 못했다.
독일군은 너무 빠르게 진격하여 보급선이 끊겼고, 진격 속도에 비해 후속 보병 부대가 돌격대의 이점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했다.
또한, 참호전으로 인해 포탄 구덩이가 많았던 진격로는 병력과 장비의 기동력을 심각하게 저해했다.
무엇보다 연합국은 전쟁 지도부의 통합이라는 결정적인 전환을 이루었다.
3월 29일, 연합국은 페르디낭 포슈 (Ferdinand Foch, 프랑스군 원수)를 협상국 서부 전선 최고 사령관에 임명하고, 지휘 계통을 일원화했다.
장 뒤부아는 영국군과 미군 동료들과 함께 독일의 공세를 필사적으로 저지하고 있었다.
장 뒤부아: "놈들이 우리 전우가 목숨을 걸고 판 참호를 너무 쉽게 뚫고 있다. 하지만 놈들의 눈빛을 보게. 승리를 향한 열정이 아니라, 굶주림이 느껴진다. 이 이상 버틸 식량도, 체력도 없을 게다. 뒤에 양키들이 온다! 버텨야 한다!"
미국의 참전은 물량전과 소모전의 양상을 보이던 참호전의 판도를 완전히 뒤집었다.
1918년 중반, 매달 25만 명에 달하는 미국 병력이 유럽에 도착하기 시작했으며, 이들은 전쟁의 참화나 염전 사상에 휩싸이지 않은 압도적인 병력, 인력 자원과 사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7월 15일, 독일군이 파리를 향해 마지막 발악을 시도한 제2차 마른 전투 (Second Battle of the Marne)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겪으면서 독일의 춘계 대공세는 완전히 좌절되었다.
이로써 장기적인 교착 상태를 해소하려던 독일의 전략적 도박은 실패로 끝났으며, 독일의 인적, 물적 자원은 돌이킬 수 없는 소모 상태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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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 항복을 촉진시킨 2차 마른전투 |
3. 백일 공세와 기동전의 부활
독일의 대공세가 끝난 직후, 포슈 원수가 이끄는 연합군은 총반격, 즉 백일 공세 (Hundred Days Offensive)를 개시했다.
1918년 8월 8일, 아미앵 전투 (Battle of Amiens)에서 영국, 프랑스, 호주, 캐나다 연합군은 대규모의 전차와 기동력 있는 보병을 앞세워 독일군 전선을 깊숙이 뚫고 들어갔다.
이는 독일군 총사령관 루덴도르프가 이날을 "독일 육군의 검은 날"이라고 표현했을 정도로 치명적인 타격이었다.
참호전은 화력이 기동을 압도하면서 발생한 양상이었지만, 이제 연합국은 탱크, 항공기, 그리고 무선 통신을 활용한 새로운 협동 전술을 통해 참호 돌파 문제를 해결했다.
특히 전차가 참호와 철조망을 무력화하고, 연합군의 포격 교리가 개선되어 (화력을 한 지점에 집중하는 방식) 독일의 철통 방어선인 힌덴부르크 선 (Hindenburg Line)마저 천천히 무너뜨릴 수 있었다.
프리츠 뮐러는 후퇴를 거듭하며 독일 본토가 점령당하는 악몽을 꾸었다.
(프리츠 뮐러, 참호 벙커 안에서): "탱크 놈들이 온다! 놈들은 진흙과 철조망을 두려워하지 않아. 이 참호는 이제 더 이상 우리의 무덤이 아니라, 우리를 가두는 덫이 되었군! (기관총 사수에게) 탄약은? 보급이 왜 이래! 동부에서 가져온 물자가 고작 이것뿐인가? 빌어먹을!"
독일 군부는 9월부터 힌덴부르크 선으로의 퇴각을 결정했다.
그러나 미군과 프랑스군의 뫼즈-아르곤 공세 (Meuse-Argonne Offensive)와 연합군의 전방위적인 압박 속에 독일의 방어선은 속절없이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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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뫼즈-아르곤 공세: 독일군의 참호진지를 향해 진격하면서 37mm포를 발사 |
4. 동맹국들의 연쇄적인 항복
독일 본토에서의 전황 악화뿐 아니라, 동맹국들의 연쇄적인 붕괴가 패전을 가속화했다.
• 불가리아 왕국: 1918년 9월 29일, 연합군에게 항복했다.
• 오스만 제국: 중동 전선에서 영국 및 아랍 반군의 공격을 받아 시나이, 팔레스타인, 메소포타미아 등지에서 패배를 거듭했으며, 10월 30일 무드로스 휴전 (Mudros Armistice)에 서명하며 항복했다.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민족자결주의 (Self-determination)의 불꽃 아래 내부의 다민족 구성이 붕괴를 가속화했다. 체코슬로바키아, 유고슬라비아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가 연합한 왕국) 등 새로운 국가들이 독립을 선언하며 제국이 사실상 해체되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는 11월 3일 빌라 지우스티 휴전 (Villa Giusti Armistice)을 체결하며 항복했다.
5. 독일 내부 혁명과 종전
독일의 루덴도르프와 힌덴부르크는 군사적 상황이 절망적임을 인지하고 10월 초에 휴전을 요청했다.
독일 군부는 패전 책임을 막 탄생한 민간 정부에 전가함으로써, 훗날 '배후 중상설' (Stab-in-the-Back Myth)이라는 터무니없는 음모론이 퍼지도록 하는 치명적인 과실을 저질렀다.
이 신화는 제2차 세계 대전의 원인이 되는 나치즘 발흥의 주요 기반이 되었다.
(※독일군은 전선에서 패배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등 뒤에서 '11월 역적'들에게 칼을 맞았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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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후 중상설 |
1918년 10월 29일, 독일 제국의 킬 군항 (Kiel)에서 수병들이 자살적인 최후 출격 명령을 거부하는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은 독일 전역으로 확산되어 독일 11월 혁명으로 발전했다.
11월 9일, 빌헬름 2세 (Wilhelm II, 독일 카이저)가 퇴위하고, 바이마르 공화국 (Weimar Republic)이 수립되었다.
이로써 독일 제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틀 후.
1918년 11월 11일 오전 5시 15분, 독일의 대표단은 프랑스 콩피에뉴 숲의 열차 안에서 연합국 대표단과 콩피에뉴 휴전협정 (Compiègne Armistice)에 서명했다.
휴전은 오전 11시에 발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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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휴전 협정에 합의한 후 콩피에뉴 숲 |
장 뒤부아와 프리츠 뮐러는 참호선에서
(프리츠 뮐러, 프랑스군 참호에서 불과 수백 미터 떨어진 독일 참호 안에서): "오전 11시라고? 이제... 총을 멈추는 건가?"
그는 자신의 소총을 내려놓았다.
손가락이 방아쇠에 닿아 있었다.
(장 뒤부아, 자신의 참호 안에서 시계를 보며): "100년의 전쟁이 끝났다. 나는 살았다. 하지만 이 진흙 구덩이 속에 묻힌 수백만 명의 영혼들은 무엇을 위해 죽었는가?"
전쟁은 4년 3개월간의 참혹한 소모전 끝에 종결되었다.
이제 유럽은 파국을 낳은 이 전쟁을 어떻게 마무리 지을지에 대한 새로운 갈등의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제5부: 강요된 평화, 다음 전쟁의 씨앗
1. 파리 강화 회의: 이상과 복수의 충돌
1918년 11월 11일, 총성이 멎었지만, 전쟁의 고통과 상흔은 더욱 첨예한 갈등으로 변모하여 평화 회의장으로 옮겨졌다.
1919년 1월 18일부터 파리 강화 회의 (Paris Peace Conference)가 개최되었고, 이 회의의 결과물인 일련의 협정들은 1차 세계 대전과 같은 전쟁이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도록 항구적인 평화 체계를 구축하려는 구체적 목표를 가지고 시작되었다.
이 회의는 연합국을 이끈 세 명의 지도자, 즉 빅 3 (Big Three)의 상충되는 이해관계에 의해 지배되었다.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 (Woodrow Wilson): 그는 14개조 평화 원칙 (Fourteen Points)을 국제 사회에 공표하기를 원했으며, 이는 민족자결주의 (Self-determination)와 국제 연맹 (League of Nations) 설립을 핵심으로 했다. 윌슨은 복수심이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독일을 정돈하기를 원했다.
(프랑스 총리) 조르주 클레망소 (Georges Clemenceau): 그는 독일에 대한 강력한 처벌을 원했다. 프랑스의 재건을 위해 독일의 경제와 정치를 압박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4년 동안 자국 영토가 전쟁터였던 프랑스의 현실을 반영했다.
(영국 총리)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David Lloyd George): 그는 강대국 사이의 균형 이론을 바탕으로 프랑스가 유럽 대륙의 주도권을 차지하는 것을 막기 위해 강대국 독일을 완전히 방치하지 않기를 원했다.
이들 사이의 타협은 그 누구도 완벽하게 만족시키지 못했다.
조약은 "모든 것은 너무 빠르게 처리되었고 전쟁의 끔찍한 현실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에 의해 엉망으로 처리되었다"거나, "강압적인 이 평화는 새로운 증오를 키울 것이다"라는 비판을 받았다.
2. 베르사유의 굴욕과 패전국 재편
1919년 6월 28일, 베르사유 궁전 안 ‘거울의 방’ (Hall of Mirrors)에서 베르사유 조약 (Treaty of Versailles)이 서명되었다.
이 조약은 총 440개의 조항으로 이루어졌으며, 제231조에서 독일과 그의 동맹국들이 전적으로 전쟁에 책임이 있다는 것을 명시했다.
이 전쟁 책임 논리는 승전국들이 독일에 잔인하고 엄청난 요구들을 정당화시켜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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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르사유 조약 |
프리드리히 '프리츠' 뮐러는 고국이 받은 이 '강요된 평화(Diktat)' 소식에 분노했다.
프리츠 뮐러: "우리는 참호에서 끝까지 싸웠다. 누가 우리에게 항복을 명령했는가? 그들은 파리에서 우리의 목에 족쇄를 채웠다! 우리는 배신당했다!"
베르사유 조약의 주요 내용은 독일에게 가혹했다.
• 영토 할양: 알자스-로렌은 프랑스에 병합되었고, 독일은 폴란드 회랑지대를 비롯한 동부 영토 상당 부분을 신생국 폴란드에게 할양했다. 이 회랑지대가 폴란드에게 할양되면서 동프로이센이 독일 본토와 분리되었는데, 독일 국민은 이를 매우 부당한 것으로 생각했으며, 독일에서는 잃어버린 땅 (失地)을 되찾아야 한다는 여론이 강하게 형성되었다.
• 식민지 상실: 독일은 모든 해외 식민지를 포기하고 연합국(영국, 프랑스, 일본, 벨기에 등)이 이를 분할하여 흡수했다.
• 군사적 제한: 독일군은 육·해군을 합쳐 10만 명으로 제한되었고, 항공 전력과 새로운 전차 및 잠수함 개발 및 배치가 금지되었다. 라인강 서쪽 지역은 비무장화되었다.
• 배상금: 프랑스 북부와 벨기에 지역의 모든 전쟁 피해에 대해 엄청난 보상금을 지불해야 했는데, 그 금액은 1,320억 독일 제국 마르크였다. (추정 대략 20년치 이상의 국가예산)
독일 제국과 함께 동맹국이었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오스만 제국은 완전히 해체되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되면서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유고슬라비아와 같은 새로운 국가들이 탄생했으며, 러시아 제국 역시 폴란드, 발트 3국, 핀란드 등이 독립하여 영토를 잃었다.
3. 새로운 갈등의 씨앗: 민족자결주의의 양면성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Self-determination)는 전쟁으로 고통받던 수많은 민족들에게 희망을 주었지만, 실제 적용은 승전국의 제국주의적 이해관계에 의해 왜곡되었다.
• 중동 분쟁의 씨앗: 오스만 제국이 해체된 후, 영국과 프랑스는 사이크스-피코 협정 (Sykes-Picot Agreement)을 바탕으로 중동 영토를 위임 통치령으로 분할했다. 쿠르드족과 아랍인, 그리고 이슬람교 시아파와 수니파가 식민지 경계선 획정에 의해 단일 국가로 통합되어 버리는 상황이 벌어졌고, 이는 후대의 민족 분쟁과 종교 분쟁, 피비린내 나는 내전의 악영향을 끼쳤다.
• 이탈리아의 분노: 승전국인 이탈리아조차도 전쟁 목표의 대부분을 달성하지 못했다고 생각하여 조약에 극도로 부정적이었다.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 원칙을 명분으로 달마티아 해안과 피우메 (Fiume)에 대한 이탈리아의 주장을 거부한 것에 분노했으며, 이 분노와 경악은 3년 후 베니토 무솔리니의 파시즘 독재 정권의 길을 여는 데 기여했다.
• 중국의 배신감: 중화민국은 협상국이었음에도, 파리 회의에서 독일이 1898년 이후 점령하고 있던 산둥반도와 자오저우만 영토에 대한 복원을 요구했으나 거부당하고, 대신 일본에 그 권리가 양도되자 배신감을 느꼈다. 이는 중국 내 5.4 운동이라는 사회적, 정치적 운동으로 이어졌으며, 중국이 베르사유 조약에 서명하지 않고 1921년에 독일과 별도의 평화 조약을 체결하게 만들었다.
4. 잃어버린 세대와 사회의 외상
전쟁의 여파는 정치와 국경뿐 아니라 유럽 전체의 문화적, 사회적 구조를 뒤흔들었다.
묵시록적 파국과 다다이즘: 산업 혁명 이후 문명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으로 낙관하던 분위기는 신기술을 이용해 서로 죽이는 전쟁을 통해 박살이 났고. 이 충격은 허무주의와 냉소주의를 낳았다.
전쟁의 공포와 충격을 겪은 젊은 세대는 후방의 기성 세대와 괴리를 느꼈고, 기존의 모든 형식적 권위와 전통적 양식을 거부하는 다다이즘 (Dadaism)이 취리히에서 창설되었다.
다다이즘은 반-문명, 반-예술을 표방하며, 트리스탄 차라의 선언처럼 "모든 것이 무너져야 한다. 백지 상태에서 다시 시작하려 했다"는 묵시론적 파국을 예술로 실현하려 했다.
장 뒤부아는 파리로 돌아와 전쟁 전의 '아름다운 시절'이 영원히 사라졌음을 깨달았다.
장 뒤부아: "내 친구 마르셀은 붉은 바지 (프랑스군 구형 군복)의 용맹함이 아닌, 염소 가스 (Chlorine Gas)의 노란 연기 속에서 죽었다. 우리는 4년간의 참호전에서 인류의 이성이 얼마나 광기에 가까울 수 있는지 배웠다. 이 세계는 미쳤다!"
전쟁 중 남성들이 전선으로 징집되면서 여성들은 선반 조작, 트럭 정비, 포탄에 화약 채우는 일 (이들은 폭약 화학물질 때문에 '카나리아'라고 불렸다) 등 남성의 영역으로 여겨지던 일자리에 대거 진출했고. 이는 경제적 독립을 가능하게 했으며, 영국에서는 1918년 30세 이상 여성에게 최초로 투표권이 부여되는 사회적 변화를 이끌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 많은 기성 세대와 남성들은 여성들이 이전의 역할로 돌아가기를 원했고, 이로 인해 성 역할에 대한 논쟁과 갈등이 격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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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부전선 여성 군수노동자 |
5. 종결: 20년의 휴전 협정
결국 파리 강화 회의에서 윌슨 대통령이 주도한 국제 연맹은 제1차 세계 대전의 재발을 막으려는 목적으로 출범했지만, 미국 상원이 국제 연맹 가입 비준을 거부하고, 미국이 전통적인 고립주의 정책으로 돌아섬으로써, 이 국제 기구는 시작부터 유명무실해졌다.
또한, 전쟁의 경제적 여파로 독일은 막대한 배상금에 시달리게 되면서 전후 하이퍼인플레이션을 겪게 되었고, 이는 민주 공화국인 바이마르 공화국이 국내 불안과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나치즘의 발호를 막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전쟁의 영웅이었던 프랑스의 페르디낭 포슈 (Ferdinand Foch, 협상국 서부 전선 최고 사령관) 원수는 베르사유 조약이 독일에 대한 처벌이 너무 허약한 조약이라고 비판하며, 이 조약은 기껏해야 20년 휴전에 불과하다고 평가했다.
(장 뒤부아, 폐허가 된 참호 위에서): "20년 휴전이라니... 우리는 정말 모든 전쟁을 끝내는 전쟁을 치렀다고 믿었는데. 포슈 원수의 말이 맞다면, 우리가 묻어둔 이 강철과 진흙의 요람이 다시 악몽을 뱉어낼 것인가?"
프리츠 뮐러는 독일 내에서 확산되는 '배후 중상설' (Stab-in-the-Back Myth)에 분노하며, 자신의 희생이 헛되지 않았음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베르사유 체제는 그에게 복수심만을 안겨주었다.
독일 군부가 패전 책임을 민간 정부에 전가한 치명적인 과실은 곧 독일에 나치즘 (Nazism)이라는 괴물을 키우는 토양이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은 모든 전쟁을 끝내는 전쟁이 될 것이라는 희망을 품었지만, 그 종결은 더 높은 과학기술과 더 강력한 무기로 뭉친 제2차 세계 대전이라는 악몽을 잉태하는 결과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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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서 배우는 교훈 (총정리)
제1차 세계 대전은 인류 역사에서 문명의 이성과 기술의 진보가 얼마나 파괴적일 수 있는지를 보여준 비극이었다.
1. 경직된 군사 계획의 위험성: 슐리펜 계획과 같은 경직된 군사 계획은 외교적 유연성을 완전히 배제함으로써, 국지적 충돌을 총력전으로 확대하는 결정적인 과실을 낳았다.
2. 화력 중심의 참호전: 기관총과 신형 포병 등 화력의 발전이 기동(보병 돌격)을 압도했음에도 불구하고, 유럽 지휘부는 공격 만능주의 (Offensive à outrance)라는 구시대적 교리에 사로잡혀, 수많은 젊은이들을 무의미한 소모전의 희생양으로 내몰았다.
3. 지휘부와 일선의 괴리: 후방의 고위 장교들과 정치인들이 전선의 끔찍한 실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전차, 항공기, 무선 통신 등 참호전을 타개할 새로운 수단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못하며, 병사들의 고통을 극대화시켰다는 비판은 피할 수 없다.
4. 전쟁 종결의 실패: 베르사유 조약은 항구적인 평화 대신 승전국의 복수심과 제국주의적 이해관계가 낳은 불완전한 평화였다. 패전국 독일의 전쟁 책임론 전가와 천문학적인 배상금 부과는 정치적 극단주의가 싹틀 수 있는 비옥한 토양을 제공하는 결정적 과오였다.
5. 예상치 못한 전환점: 러시아 혁명과 레닌의 귀환을 전쟁의 '무기'로 이용하려던 독일의 전략은, 공산주의라는 거대한 이념적 위협을 세계에 풀어놓는 장기적인 위험을 초래했다. 또한, 미국이 물량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참전하면서, 전쟁의 승패는 결국 국가 총력전과 경제력의 싸움이라는 냉혹한 현실로 귀결되었다.
6. 기술 발전의 양면성: 화학 공업의 발전은 독가스와 같은 대량 살상 무기를 낳아, 인류의 이성적 문명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동시에 참호전의 악몽을 타개하기 위해 개발된 전차와 항공기 등의 신기술은 훗날 국제정치학에서 대규모 전면전을 회피하는 억지력을 형성하는 데 기여하는 아이러니를 보여주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은 오판과 오만, 그리고 경직된 구조가 낳은 비극이었다.
당시 유럽의 열강들은 자신들의 군사적, 경제적 역량을 과신하며 대규모 전쟁을 '짧고 영웅적인 모험'으로 착각했지만, 현대 기술과 총력전 체제가 결합된 전쟁은 통제 불가능한 괴물이 되어 인류를 멸망 직전까지 몰고 갔다.
이 비극은 우리에게 권력자들의 단기적 이해관계를 넘어선 장기적인 통찰력, 특히 외교적 유연성(Flexibility)의 중요성을 가르쳐준다.
유연하지 못한 태도는 진퇴양난의 딜레마에 빠져 결국 스스로와 주변을 소모시키게 될 뿐이기 때문이다.
이 글은 1차 세계대전의 전개·전술·정치·사회적 파급을 종합해 설명하되, 독자의 몰입을 위해 일부 장면 묘사와 발화를 서사적으로 재구성했습니다.
수치·전투 피해 규모·무기 성능과 같은 정량 정보는 다수의 2차 연구와 1차 사료를 교차 검토해 사용했으며, 단정이 어려운 구간은 구간형 표현을 사용합니다.
전설·과장에 가까운 수치는 배제하고(예: ‘몇 분 내 수천 명’ 등), 전선·시기·부대별 편차가 큰 통계는 평균치나 추세로 서술합니다.
지명·연대·부대명은 당시 표기 관례를 따르되, 현대 독자의 이해를 위해 통용 표기를 병기합니다.
독가스, 포격, 참호전 등 민감 주제는 인도적 관점에서 다루며, 희생자·민간인 피해에 대한 묘사는 최소한의 필요 범위로 제한합니다.
오류·오탈자·해석 보완 제안은 언제든 환영합니다.
확인 후 빠르게 반영합니다.
World War I reshaped geopolitics and warfare.
Sparked by Sarajevo, alliances mobilized, trench lines hardened from the North Sea to Switzerland, and industry delivered artillery, machine guns, gas, and Uboats at scale.
The Somme and Verdun exposed attrition’s logic; the East unraveled empires. America’s entry tipped logistics and morale.
Total war militarized economies, women filled factories, and propaganda bound home fronts.
1918 offensives, then Allied counterblows, broke German capacity.
Armistice set fragile peace; Versailles redrew borders, bred grievance, and left a pandemic-shadowed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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