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이는 실재했나: 슐리만 발굴부터 트로이 VI·VIIa 논쟁까지 (The History of Troy)


신화와 실증 사이: 트로이의 역사성 탐구


1. 전설 속 도시, 트로이를 찾아서

수천 년간 호메로스의 대서사시 『일리아스』를 통해 전해 내려온 트로이 전쟁 이야기는 서구 문명의 가장 강력한 신화 중 하나로 자리 잡아 왔습니다. 

아킬레우스와 헥토르 같은 영웅들의 격돌, 신들의 개입, 그리고 10년간 이어진 장대한 공방전은 오랫동안 제우스와 티탄의 싸움처럼 역사적 근거가 없는 문학적 상상력의 산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과연 트로이는 순수한 허구의 공간에 불과했을까요? 

이 질문은 고고학과 역사학, 문헌학계에 던져진 오랜 화두였습니다. 

본 포스팅은 이 오래된 질문에 답하기 위해, 문학적 서사와 고고학적 발굴, 그리고 현대적 데이터 분석이라는 세 가지 축을 중심으로 트로이의 역사적 실재성을 다각적으로 검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본 글은 먼저 트로이 신화의 원전인 호메로스의 서사를 분석하여 그 문학적·역사적 맥락을 살피고, 이어서 신화를 역사로 증명하고자 했던 하인리히 슐리만의 극적인 발굴 과정을 추적할 것입니다. 

이후 슐리만의 성과와 한계를 바탕으로 100년 이상 축적된 현대 고고학의 증거들을 심층 분석하고, 마지막으로 네트워크 과학이라는 새로운 관점을 통해 서사 구조 자체에 내재된 현실성을 계량적으로 평가하고자 합니다. 

이러한 종합적인 접근을 통해 우리는 신화의 안개를 걷어내고 후기 청동기 시대의 역사적 실체로서 트로이에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 장에서는 이 모든 탐구의 시작점인 호메로스의 서사를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2. 신화 속의 트로이: 호메로스의 서사

트로이 전쟁 이야기는 서구 문학의 원형이자, 고대 세계의 역사 인식을 형성한 중요한 축이었습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는 단순한 문학 작품을 넘어, 영웅주의, 운명, 신과 인간의 관계 등 보편적 주제를 담아내며 후대 문명에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 서사는 고대인들에게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들의 정체성과 세계관을 구성하는 역사적 기억의 일부로 기능했습니다.


『일리아스』에 묘사된 트로이 전쟁의 서사는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가 스파르타의 왕비 헬레네를 납치하면서 시작됩니다. 

이는 그리스 연합군이 대규모 함대를 이끌고 트로이를 침공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후 10년간의 지루하고 참혹한 공방전으로 이어집니다. 

서사시는 전쟁의 마지막 해에 벌어진 사건들을 중심으로, 그리스 최고의 영웅 아킬레우스와 트로이의 총사령관 헥토르의 갈등과 비극적인 대결을 생생하게 그려냅니다.


헬레네의 납치


이 이야기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대에 국가적 정체성과 애국심을 고취하는 데 적극적으로 활용되었습니다. 

역사가 투키디데스는 이 전쟁을 "유럽과 아시아 사이의 첫 번째 대전"으로 평가하며 역사적 사건으로 다루었고, 로마인들은 트로이의 영웅 아이네아스가 이탈리아로 건너와 자신들의 시조가 되었다고 믿으며 국가적 자부심의 근원으로 삼았습니다. 

이처럼 트로이 서사는 단순한 신화를 넘어 실재했던 역사적 사건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러나 근대에 이르러 합리주의가 대두되면서, 고고학적 증거가 발견되기 전까지 트로이 이야기는 역사적 근거가 없는 신화로 간주되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시각이었습니다. 

신들의 직접적인 개입과 초인적인 영웅들의 활약상은 이 이야기를 제우스와 티탄의 싸움과 같은 순수한 신화의 영역으로 밀어 넣었습니다. 

이러한 학문적 통념은 한 인물의 집념에 의해 극적으로 깨지게 됩니다. 


3. 신화의 고고학적 탐색: 하인리히 슐리만의 발굴

어린 시절에 읽은 『일리아스』의 이야기가 단순한 신화가 아닌 역사적 사실이라고 굳게 믿었던 인물, 하인리히 슐리만의 등장은 트로이 연구의 결정적인 전환점이었습니다. 

상인으로서 막대한 부를 쌓은 그는 자신의 전 재산을 쏟아부어 전설 속 도시를 찾아 나섰고, 그의 집념은 고고학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습니다. 

슐리만의 발굴은 고고학적 성과와 방법론적 재앙 사이의 긴장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이며, 그의 업적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선구자로서의 직관과 파괴자로서의 조급함을 분리하여 비판적으로 검토해야 합니다.


하인리히 슐리만


3.1. 발굴 과정과 '프리아모스의 보물' 발견

슐리만은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선물 받은 책 속 삽화를 보고 호메로스의 서사가 사실임을 증명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국제 무역상으로 큰 성공을 거둔 그는 마침내 꿈을 실현할 재산을 확보한 뒤, 트로이 발굴에 착수했습니다.

슐리만이 트로이의 유력한 위치로 오늘날의 '히사를리크 언덕'을 특정할 수 있었던 데에는 영국인 아마추어 고고학자 프랭크 캘버트의 역할이 결정적이었습니다. 

캘버트는 이미 히사를리크 언덕이 트로이일 가능성을 제시하고 일부를 소유하며 발굴을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슐리만은 캘버트의 연구를 바탕으로 확신을 얻고 발굴을 시작했지만, 결국 그 공로는 대부분 슐리만 자신에게 돌아갔습니다.


1873년, 슐리만은 마침내 극적인 발견을 이루어냅니다. 

그는 대규모 화재의 흔적이 남은 '트로이 II' 지층에서 수많은 황금 왕관, 잔, 목걸이 등 엄청난 양의 보물을 발굴했습니다. 

그는 이 유물들을 『일리아스』에 등장하는 트로이의 마지막 왕 프리아모스의 이름을 따 '프리아모스의 보물'이라 명명하고, 아내 소피아에게 유물을 착용시킨 사진과 함께 전 세계에 알렸습니다. 

이 발견은 신화로만 여겨졌던 트로이의 존재를 세상에 각인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슐리만의 부인 소피아가 발굴한 보물을 두르고 찍은 사진


3.2. 엇갈린 평가: 선구자인가, 파괴자인가

슐리만의 발견은 고고학의 역사를 바꾸었지만, 그의 발굴 방식과 개인적 신뢰성은 수많은 비판을 낳았습니다. 

후대의 연구는 그가 금광에서 부당한 거래로 재산을 불렸다는 사실을 밝혀내는 등, 그의 영웅적인 자서전 역시 상당 부분 과장과 허구로 가득 차 있음을 폭로했습니다. 

그의 공과 과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습니다.


비전문적 발굴 

슐리만은 호메로스 시대의 트로이를 찾는 데만 몰두한 나머지, 그가 목표로 삼은 지층에 도달하기 위해 상위 지층(BC 1000년 이후)의 유적들을 무차별적으로 파괴했습니다. 

그가 판 거대한 참호는 '슐리만 참호'라 불리며, 돌이킬 수 없는 유적 파괴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1880년 히사를리크. 상단의 홈은 "슐리만 참호"


시대 착오적 해석 

슐리만이 '프리아모스의 보물'을 발견한 '트로이 II' 지층은 후대 연구를 통해 실제 트로이 전쟁 시기(BC 13세기)보다 약 1,000년이나 앞선 초기 청동기 시대의 유적인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그의 해석은 열망에 기반한 성급한 결론이었습니다.


프리아모스의 보물에서 발견된 금병과 잔


문화재 밀반출 

그는 발굴한 유물들을 당시 유적을 관할하던 오스만 제국의 허가 없이 몰래 독일로 빼돌렸습니다. 

이 보물들은 제2차 세계대전 말기 베를린을 점령한 소련군에 의해 탈취되어, 오늘날 터키와 독일의 반환 요구에도 불구하고 모스크바 푸시킨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슐리만이 남긴 긍정적 유산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의 열정적인 탐사는 트로이가 신화가 아닌 실존했던 도시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증명했으며, 고고학에 대한 전 세계적인 대중의 관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또한 말년에 고고학자 빌헬름 되르펠트와 협력하여 히사를리크 유적이 9개의 주요 문화층으로 이루어진 복합 유적임을 밝혀내는 데 기여함으로써 후대 연구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결론적으로 슐리만은 고고학 탐사의 선구자이자 동시에 수많은 오류를 범한 인물로 평가됩니다. 

그의 탐사는 현대 고고학이 축적한 방대한 증거들을 통해 재평가되고 있으며, 그의 성급한 결론 너머의 진실을 밝히는 것은 후대 학자들의 몫이 되었습니다.


청동기 후기 트로이의 성벽


4. 히사를리크 언덕의 층위: 고고학적 증거 분석

슐리만 이후 100년 이상 이어진 체계적인 발굴 작업을 통해, 히사를리크 언덕은 기원전 3600년부터 기원후 500년까지 약 4,000년에 걸쳐 도시 위에 도시가 건설된 9개의 주요 문화층으로 구성된 복합 유적임이 밝혀졌습니다. 

이 층위들은 트로이의 장구한 역사를 증언하며, 학자들은 이 중 어느 지층이 호메로스의 서사와 일치하는지를 두고 치열한 과학적 논쟁을 벌여왔습니다. 

특히 트로이 VI층과 VIIa층이 유력한 후보지로 압축되었습니다.


4.1. 트로이 VI층: 거대한 요새 도시의 등장

슐리만의 동료였던 빌헬름 되르펠트는 '트로이 VI'(BC 1750~1300년)를 호메로스의 트로이로 지목했습니다. 

이 시기의 트로이는 인상적인 석회암 성벽과 높은 방어탑을 갖춘 강력한 요새 도시의 면모를 보여줍니다. 

성채 내부에서는 엘리트 계층이 거주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독립된 다층 가옥들이 발견되었습니다.


최근의 발굴 성과는 트로이 VI의 규모가 예상보다 훨씬 컸음을 보여줍니다. 

성채 남쪽에서 약 30헥타르에 달하는 거대한 하층 도시의 존재가 확인되었으나, 현재까지 발굴된 면적은 전체의 2~3%에 불과하여 많은 증거가 유실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발견은 트로이 VI가 단순한 성채가 아니라, 당대 아나톨리아의 주요 도시 중 하나였음을 입증합니다.


고고학자 칼 블레겐은 이 도시의 파괴 원인이 인간의 공격이 아니라 대규모 지진이었음을 주장했습니다. 

이 해석은 수십 년간 정설로 받아들여졌지만, 최근 일부 학자들은 트로이 VIIa층이 아닌, 미케네 문명의 전성기에 해당하는 트로이 VI층이야말로 호메로스 서사의 배경이라는 가설을 다시 검토하고 있어 학문적 논쟁은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


4.2. 트로이 VIIa층: 전쟁의 흔적

현재까지의 증거에 따르면, 다수의 학자들은 '트로이 VIIa'(BC 1300~1180년)를 트로이 전쟁의 실제 무대로 가장 유력하게 보고 있습니다. 

이 지층은 트로이 VI가 지진으로 파괴된 직후 그 폐허 위에 재건된 도시로, 이전보다 규모는 작고 조밀했지만, 명백한 전쟁의 흔적을 담고 있습니다.

트로이 VIIa층이 전쟁에 의해 파괴되었음을 뒷받침하는 고고학적 증거는 다음과 같습니다.


1. 공성전 대비의 흔적: 주택 내부에서 평시보다 비정상적으로 많은 수의 대형 저장용 항아리(pithos)와 식량 저장고(silo)가 발견되었습니다. 

이는 장기간의 포위 공격과 같은 비상사태에 대비했음을 시사합니다.

2. 폭력적 파괴의 증거: 도시 전역에서 대규모 화재의 흔적이 발견되었으며, 성벽 근처에서는 미처 수습되지 못한 채 방치된 시신들과 화살촉 같은 무기들이 출토되었습니다. 

이는 자연재해가 아닌 폭력적인 파괴가 있었음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18세기 전설적인 트로이 약탈 묘사


3. 연대의 일치: 이 지층의 연대는 BC 13세기 말에서 12세기 초로, 그리스 신화에서 전해지는 트로이 전쟁의 시기와 거의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이는 『일리아스』의 이야기가 이 시기의 역사적 사건에 대한 기억을 반영했을 가능성을 강력하게 뒷받침합니다.


이러한 고고학적 증거는 호메로스의 서사가 단순한 문학적 창작이 아니라, 특정 역사적 사건에 뿌리를 두고 있을 가능성을 시사합니다.


4.3. 문헌 및 자연과학적 교차 검증

고고학적 증거는 다른 학문 분야의 연구를 통해 더욱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 문헌적 증거: 트로이 전쟁 시기와 동시대 강대국이었던 히타이트 제국의 문서에서 중요한 단서가 발견되었습니다. 

이 문서들에는 '윌루사(Wilusa)'와 '타루이사(Taruisa)'라는 지명이 등장하는데, 이는 각각 트로이의 그리스식 명칭인 '일리온(Ilios)'과 '트로이아(Troia)'를 가리키는 것으로 유력하게 지목됩니다.(논쟁)

특히 이 문서들은 윌루사가 '아히야와(Ahhiyawa)'로 불리는 미케네 문명(그리스)과 군사적 갈등 관계에 있었음을 암시하여, 트로이의 역사적 실재성과 전쟁의 배경을 뒷받침하는 강력한 증거로 평가됩니다.

• 자연과학적 증거: 지질학자 존 C. 크래프트(John C. Kraft)의 연구는 호메로스가 묘사한 지형이 고대의 실제 지형과 상당 부분 일치함을 보여주었습니다. 

그의 연구에 따르면, 현재 내륙에 위치한 히사를리크 언덕은 고대에는 바다와 인접한 해안 지역이었으며, 그리스 함대가 정박했다고 묘사된 평야 역시 당시의 해안선과 부합합니다. 

이는 『일리아스』의 배경 묘사가 단순한 상상이 아니라 실제 지형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이처럼 고고학, 문헌학, 자연과학의 증거들은 서로 맞물려 트로이의 실체를 입체적으로 재구성하고 있습니다. 


트로이 전쟁 당시의 지도


5. 서사의 구조 분석: 네트워크 과학의 새로운 관점

전통적인 고고학 및 문헌 연구를 넘어, 최근에는 통계물리학과 네트워크 이론을 통해 신화 서사의 구조적 특징을 분석하는 혁신적인 연구 방법이 등장했습니다. 

이 접근법은 서사 속 등장인물들 간의 상호작용을 하나의 사회 관계망으로 간주하고, 그 구조가 실제 인간 사회의 네트워크와 얼마나 유사한지를 계량적으로 평가합니다. 

이를 통해 서사가 담고 있는 현실성(realism)의 정도를 객관적으로 측정할 수 있습니다.


이 연구의 핵심 개념 중 하나는 '사교성(assortativity)'입니다. 

실제 사회 관계망에서는 영향력 있는 인물(연결이 많은 사람)이 다른 영향력 있는 인물과 연결되는 경향이 높은데, 이를 '사교적(assortative)'이라고 합니다. 

반면, 허구의 창작물에서는 종종 주인공 한 명에게 모든 관계가 집중되는 등 인위적인 구조로 인해 이러한 경향이 낮은 '비사교적(disassortative)' 특징을 보입니다. 

대표적인 예로 수많은 영웅이 등장하는 마블 코믹스 세계관(Marvel Comics Universe)의 네트워크는 인위적인 구조로 인해 강한 비사교성을 띱니다.

아래 표는 『일리아스』, 『베오울프』, 그리고 아일랜드 신화 서사시인 『타인 보 쿠얼릉거(Táin Bó Cúailnge)』 세 작품의 인물 관계망을 분석한 결과를 비교한 것입니다.


서사시
네트워크 특성
분석 및 해석
일리아스
명백한 사교성(Clearly assortative)
등장인물 간의 상호작용 구조가 실제 사회 관계망과 매우 유사함. 이는 서사가 현실 사회를 상당히 정확하게 반영했을 가능성을 시사하며, 역사적 사실성의 근거를 보강함.
베오울프
약한 비사교성(Mildly disassortative)
주인공 '베오울프'를 제거하면 네트워크가 사교적으로 변함. 이는 실제 사회 구조에 허구적 영웅을 삽입한 형태일 가능성을 암시함.
타인 보 쿠얼릉거
강한 비사교성(Highly disassortative)
네트워크가 매우 인위적으로 보이나, 가장 연결성이 높은 6명 인물과 관련된 '약한 연결'들을 제거하면 사교적으로 변함. 이는 구전 과정에서 여러 인물이 하나의 영웅으로 합쳐졌을 가능성을 시사함.


위 분석 결과는 매우 흥미로운 점을 시사합니다. 

다른 두 서사시가 허구적 요소나 구전 과정에서의 변형 흔적을 네트워크 구조를 통해 드러내는 반면, 『일리아스』의 인물 관계망은 놀라울 정도로 현실적입니다. 

이는 트로이 전쟁 이야기가 한 작가의 순수한 창작물이 아니라, 실제 인물들 간의 상호작용에 기반한 역사적 사건을 바탕으로 구성되었을 수 있다는 강력한 정황 증거가 됩니다. 


6. 역사적 실체로서의 트로이

본 글은 호메로스의 문학적 서사, 100년 이상 축적된 고고학적 증거, 그리고 네트워크 과학이라는 최신 분석 기법을 통해 전설 속 도시 트로이의 역사성을 다각적으로 검토했습니다. 

문헌은 트로이가 고대 강대국 히타이트의 기록에도 등장하는 실존 지명일 가능성을 강력히 시사했고, 고고학은 히사를리크 언덕에서 전쟁으로 파괴된 도시의 흔적을 발굴했으며, 네트워크 분석은 『일리아스』의 인물 관계망이 실제 사회와 매우 유사한 구조를 가졌음을 입증했습니다.


이러한 증거들을 종합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일리아스』에 묘사된 개별 사건, 예를 들어 '트로이 목마'의 실재 여부나 신화 속 인물들의 구체적인 행적을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기원전 670년경의 미코노스 도기에서 발견된 트로이 목마의 가장 오래된 묘사


하지만 현재까지의 증거는 다음 사실들을 강력하게 뒷받침합니다.


• 후기 청동기 시대에 현재 터키의 히사를리크 언덕에는 강력하고 부유한 요새 도시가 실존했습니다.

• 이 도시는 다르다넬스 해협의 전략적 요충지로서, 에게해의 미케네 문명(그리스)과 교역 및 군사적 갈등 관계에 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 BC 13세기 말 파괴된 '트로이 VIIa' 지층의 흔적은 호메로스가 노래한 대전쟁의 '역사적 핵심(kernel of historical fact)'을 반영합니다.


트로이의 이야기는 한 아마추어의 집념에서 시작하여, 1세기에 걸친 정밀한 고고학적 탐사, 그리고 21세기 네트워크 과학의 정량적 분석에 이르기까지, 서로 다른 시대와 방법론이 한 점으로 수렴하며 그 역사적 실체를 드러낸 특별한 사례입니다. 

트로이는 더 이상 과거 국가적 자긍심의 상징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그것은 "흙과 돌로 옷을 입은 동화"이자, 신화를 역사로 바꾸려는 인간의 끊임없는 열망을 보여주는 위대한 상징입니다. 

동시에, 문헌과 유물을 대조하려는 시도가 시작된 곳으로서, 현대 고고학이 태동한 정신적 고향으로 그 역사적 가치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이 글은 호메로스 『일리아스』, 히사를리크(트로이) 발굴 성과, 후기 청동기 시대 아나톨리아와 히타이트 문헌 연구, 지질·지형 복원 연구, 인물 관계망(네트워크) 분석 연구처럼 공개된 학술·전시 자료를 바탕으로 구성했습니다.

다만 트로이 6층과 7a층 중 어느 층이 ‘전쟁의 핵심 기억’에 더 가깝냐는 문제, 윌루사(Wilusa)·아히야와(Ahhiyawa) 같은 지명 비정(比定), 파괴 원인처럼 학계에서 해석이 갈리는 지점은 단정하지 않고 ‘가능성’으로 정리했습니다.

읽기 흐름을 위해 문단 구성과 연결은 글쓴이가 정리했으며, 신화적 장면(예: 트로이 목마)의 실재 여부는 현재 증거만으로 확정할 수 없다는 전제 위에서 봐 주세요.


This post tests whether the Troy behind the Iliad was real. 

It reads Homer as an epic shaped by collective memory, then follows Schliemann at Hisarlik—“Priam’s Treasure” and the controversies: destructive trenching, wrong dating, and illicit export. 

Later excavations show Hisarlik as a multi-layer city; key candidates are Troy VI (a large fortified center, likely ended by earthquake) and Troy VIIa (a denser rebuilding with siege storage, fire, weapons, and casualties suggesting violent destruction in the late 13th–early 12th century BCE). 

Hittite references to Wilusa/Ahhiyawa and shoreline studies add support. 

Network analysis finds the Iliad’s social ties unusually realistic, pointing to a historical kernel though not provable set pieces like the Trojan Hor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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