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5 을축년 대홍수: 한강이 바꾼 서울 지도와 드러난 고대사 (The Eulchuk Flood of 1925)


100년 전의 경고: 서울을 삼킨 을축년 대홍수 이야기


100년 전, 하늘에 구멍이 뚫리다

1925년 한반도를 덮친 재앙을 당시 사람들은 ‘미증유(未曾有)’, 즉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던 일’이라 불렀습니다. 

그해 여름, 마치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쏟아진 비는 한반도 전역을 할퀴었고, 특히 수도 경성(오늘날의 서울)을 흐르는 한강은 거대한 괴물처럼 돌변해 도시를 삼켜버렸습니다.

100년이 지난 지금도, 서울에 폭우가 쏟아지면 어김없이 ‘을축년 대홍수 이래’라는 말이 소환됩니다.

왜 우리는 이토록 끈질기게 100년 전의 재앙을 기억하는 것일까요? 

이 사건은 오늘날까지도 ‘20세기 한반도 최악의 홍수’로 기록될 만큼 우리 역사에 깊은 상흔을 남겼습니다.

이 글은 단순히 오래된 재난 기록을 나열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대한 물줄기가 어떻게 서울의 지도를 바꾸고, 땅속에 잠들어 있던 수천 년 전 고대 역사를 깨웠으며, 나아가 식민지 백성들의 아픔과 차별이라는 시대의 맨얼굴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는지에 대한 생생한 역사 이야기입니다. 

100년 전의 경고 속으로 함께 들어가 보겠습니다.


1. 무엇이 괴물을 만들었나: 대홍수의 원인과 피해

1.1. 멈추지 않던 비, 넘쳐버린 강

1925년의 여름은 유독 길고 혹독했습니다. 

7월부터 9월까지 총 네 차례에 걸쳐 홍수가 한반도를 휩쓸었습니다. 

그중에서도 한강 유역에 재앙을 몰고 온 것은 복구할 틈도 없이 연이어 닥친 7월의 두 차례 집중호우(7월 9~11일, 15~19일)였습니다.

쏟아진 비의 양은 기록적이었습니다. 

당시 경성의 7월 한 달간 강우량은 832.9mm에 달했는데, 이는 당시 여름 3개월(6~8월) 평균 강우량인 690mm를 한 달 만에 훌쩍 뛰어넘는 엄청난 양이었습니다. 

이 폭우는 대만 부근에서 발생한 태풍이 북상하다가, 강력한 오호츠크해 고기압에 가로막혀 서해상에서 오랫동안 정체하면서 한반도 중부지방에 엄청난 양의 수증기를 폭탄처럼 쏟아부은 것이 원인이었습니다.

결국 한강의 수위는 인도교(현 한강대교) 지점에서 11.66m, 구용산 지점에서는 12.74m라는 사상 최고치를 기록하며 모든 것을 집어삼키기 시작했습니다.


을축년 대홍수 당시 문평산에서 내려다본 모습.


1.2. 예고된 인재(人災): 미흡했던 대비와 막대한 피해

을축년 대홍수는 단순한 자연재해를 넘어, 일제강점기 식민 당국의 미흡하고 차별적인 방재 대책이 피해를 키운 인재(人災)의 성격이 짙었습니다. 

체계적인 치수 계획 없이 일본인 거주지와 군사 시설 위주로 임시방편적인 제방 공사만 진행되었고, 대다수 조선인 거주 지역은 홍수에 무방비로 노출되었습니다.

그 피해는 천문학적이었습니다. 

조선총독부의 공식 집계만 보더라도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피해 항목
수치
비고
전국 사망자
647명
조선총독부 공식 집계
가옥 유실
6,363호
가옥 붕괴
17,045호
가옥 침수
46,813호
총 피해액
1억 322만 원
당시 총독부 1년 예산의 58%


수도 경성의 기반 시설은 완전히 마비되었습니다. 

한강 인도교와 철교가 무너져내렸고, 용산역과 기관차고는 물에 잠겨 철도 운행이 중단되었습니다. 

당인리 발전소와 노량진 수원지가 침수되면서 수도 경성은 전기와 상수도가 모두 끊긴 암흑의 섬으로 고립되었습니다. 

당시 신문 기사는 무너진 제방 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강물을 "붉은 물이 폭포 쏟아지듯이" 맹렬하게 밀려들었다고 묘사하며 처참했던 상황을 전했습니다.

이처럼 을축년 대홍수는 자연의 위력과 인간의 미흡한 대비가 빚어낸 거대한 재앙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재앙의 고통은 모두에게 공평하지 않았습니다.


을축년 대홍수 당시 서울 지역의 피해를 기록한 《경성부수재도》


2. 물에 드러난 차별: 식민지 백성의 이중고

2.1. 제방 안의 일본인, 제방 밖의 조선인

대홍수는 식민지 조선 사회에 깊이 뿌리내린 민족 차별의 현실을 극명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제방은 단순한 흙더미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생사를 가르는 경계이자, 민족을 가르는 차별의 벽이었습니다. 

제방 안쪽, 일본인들의 신시가지와 군사기지가 들어선 용산은 미흡하나마 보호의 대상이었지만, 제방 바깥, 가난한 조선인 노동자들이 하루하루를 버텨내던 이촌동은 처음부터 버려진 땅이었습니다.

약 500호가 모여 살던 이촌동은 철도 노동자, 뗏목 만드는 톱질꾼, 모래를 파서 나르는 일꾼 등 가난한 조선인들이 모여 사는 노동촌이었습니다. 

1920년 홍수 이후 일제는 용산 일대에 방수 제방을 축조했지만, 그 범위는 철도까지였습니다. 

이촌동 주민들이 지속적으로 제방 증설을 요구했지만 예산 부족을 핑계로 외면당했습니다. 

결국 제방 바깥에 방치된 이촌동은 홍수 피해를 고스란히 뒤집어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연재해 앞에서조차 보호의 우선순위는 민족에 따라 달랐던 것입니다.


2.2. 구호의 손길마저 달랐던 현실

재난 이후의 구호 활동에서도 차별은 계속되었습니다. 

조선총독부의 ‘조선수해이재자구제회’라는 관제 단체를 통한 구제 활동은 일본인에게 편중되었습니다.

이에 조선 사회에서는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 신문사와 각지의 청년회, 종교 단체들이 자발적으로 구호반을 조직하고 의연금을 모금하며 공적 구호가 닿지 않는 동포들을 구제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이들은 지역을 분담하여 체계적으로 구호 활동을 펼치며 민족적 연대를 보여주었습니다.


더욱 비극적인 것은 총독부의 사후 대책이었습니다. 

총독부는 이촌동에 대한 근본적인 방재 대책을 세우는 대신, 아예 동네를 없애버리는 ‘폐동(廢洞)’ 결정을 내리고 주민들을 다른 곳으로 강제 이주시켰습니다.

하지만 절망 속에서도 희망은 꺼지지 않았습니다. 

강 건너 노량진으로 강제 이주된 이촌동 주민들은 그곳에 ‘복흥촌(復興村, 다시 일어선 마을)’ 이라는 이름의 새 터전을 일구었습니다. 

이는 단순한 재정착이 아닌, 스스로의 삶을 되찾으려는 도전적인 저항이었습니다. 

그들은 상부상조를 위해 용흥청년회(湧興靑年會)를 설립하고,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양영학교라는 강습소를 여는 등 자치 공동체를 이루며 스스로의 힘으로 삶과 미래를 재건해 나갔습니다.

이처럼 홍수는 단순한 물난리를 넘어 식민지 백성에게 더 큰 상처를 남겼지만, 그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한편, 이 거대한 물길은 슬픔만 남긴 것이 아니라,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역사의 선물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3. 진흙 속에서 피어난 역사: 뜻밖의 고대 유물 발견

을축년 대홍수는 참혹한 비극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땅속에 잠들어 있던 우리 고대 유적을 세상에 드러내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재앙이 남긴 뜻밖의 선물이었습니다.


발견된 유적
발견 과정
역사적 의의
서울 암사동 유적
홍수로 한강 변의 흙이 대규모로 쓸려나가면서, 땅속에 묻혀 있던 빗살무늬토기와 움집터가 드러남.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신석기 시대 최대 규모의 마을 유적으로, 당시 생활상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임.
풍납토성
거센 물살에 풍납토성의 서쪽 성벽이 무너져 내리면서, 그 단면에서 청동 초두(술을 데우는 그릇), 금귀고리청동 쇠뇌(석궁), 백동 거울금제 허리띠 등 백제 왕실의 보물들이 쏟아져 나옴.
오랫동안 논쟁의 대상이었던 백제 초기 수도, 즉 한성(漢城)의 왕성일 가능성을 강력하게 증명하는 결정적 계기가 됨.


이 발견들은 단순한 유물 몇 점을 찾아낸 것을 넘어, 신석기 시대부터 백제 초기까지, 우리가 미처 몰랐던 고대사의 중요한 퍼즐 조각을 맞춰주었습니다.

하지만 이 위대한 발견의 이면에는 식민지 시대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당시 일본인 학자들과 조선총독부는 한반도 역사를 "정체되고 발전 없는 타율적인 역사"로 규정하려는 식민사관을 퍼뜨리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발견된 유적들은 그 진정한 가치를 온전히 인정받기보다, 때로는 '원시적인 흔적'으로 치부되거나 식민 통치의 성과로 포장될 위험이 있었습니다. 

실제로 암사동 유적의 역사적 중요성은 해방 이후에야 비로소 제대로 된 평가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홍수가 남긴 상처 위에서 우리 민족의 유구한 역사가 다시금 빛을 보게 된 것입니다. 

이 거대한 사건은 이후 서울의 미래를 설계하는 방식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4. 물길이 바꾼 도시의 운명: 홍수가 남긴 유산

4.1. 도시 계획의 대전환

을축년 대홍수 이후, ‘치수(治水)’는 경성 도시계획의 가장 중요한 화두로 떠올랐습니다. 

다시는 이런 재앙을 겪지 않아야 한다는 인식이 도시의 미래를 설계하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하지만 도시 확장의 방향을 두고 식민 당국 내에서도 의견이 엇갈렸습니다.


• 조선총독부: 대규모 치수 공사를 통해 한강의 범람을 막을 수 있다고 믿고, 한강 이남의 영등포 등지로 도시를 대규모 확장하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 경성부: 막대한 치수 비용에 부담을 느끼고, 홍수 위험이 적은 고지대나 한강에서 먼 지역으로 도시를 확장해야 한다는 ‘고지도시론(高地都市論)’을 주장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더 큰 권력을 가진 조선총독부의 계획이 관철되었습니다. 

이 결정은 이후 수십 년간 한강에 대한 대규모 치수 사업과 강남 개발이 이루어지는 배경이 되었습니다. 

100년 전의 홍수가 오늘날 서울의 모습을 결정한 중요한 분기점이 된 셈입니다.


4.2. 두려움에서 삶의 공간으로

광복 이후에도 을축년 대홍수의 끔찍한 기억은 계속해서 소환되었습니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이어진 한강종합개발사업과 같은 대규모 치수 사업들은 ‘을축년의 비극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강력한 명분 아래 추진되었습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오늘날의 한강은 더 이상 통제 불가능한 ‘두려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대신 수많은 시민이 여가와 휴식을 즐기는 ‘삶의 일부’로 자리 잡았습니다. 

현재 송파근린공원에 남아있는 ‘을축년 대홍수 기념비’와 봉은사의 ‘수해 구제 공덕비’ 등은 100년 전의 아픔과 극복의 역사를 말없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송파근린공원 입구에 있는 을축년 대홍수 기념비


특히 봉은사의 공덕비는 당시 주지였던 나청호(羅晴湖) 스님이 사찰의 재산을 털어 배를 구해, 잠실 일대에서 고립된 주민 708명을 구출한 숭고한 희생과 연대의 기록을 담고 있습니다.

100년 전, 미증유의 재앙이었던 을축년 대홍수는 우리에게 아픈 상처와 교훈을 동시에 남겼습니다. 

예측 불가능한 기후 위기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날, 우리는 100년 전의 이 경고에서 무엇을 배우고 준비해야 할까요? 역사가 던지는 질문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이 글은 1925년 을축년 대홍수와 관련된 당시 신문 기사, 조선총독부 자료, 후대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역사 서사입니다. 

사건의 연도·수치·지명·인물 관계는 사료를 우선으로 삼았으나, 일부 장면 묘사와 심리·대사는 독자의 몰입을 돕기 위한 서사적 각색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홍수 피해, 식민지 차별, 기후 위기와 같은 주제는 단일 글로 모두 포괄할 수 없으므로, 이 글은 이해를 돕는 입문용 해설로 읽어 주시고 보다 깊은 판단은 다양한 연구와 자료를 함께 참고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This article revisits the 1925 Eulchuk flood, when record rains turned the Han River into a torrent that drowned Gyeongseong and exposed the limits of colonial flood control. 

It shows how damage fell heaviest on Korean working-class districts like Ichon, left outside protective embankments, and how relief and rebuilding were shaped by ethnic discrimination, forced relocation and grassroots efforts such as the Bokheungchon self-help community. 

The flood also exposed Amsa-dong and Pungnap Fortress, transforming knowledge of Korea’s ancient past, and it pushed new schemes of urban planning and river engineering that slowly turned the Han from a feared threat into today’s civic riverfront while leaving hard questions about climate risk, inequality and historical mem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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