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린 귀 하나가 부른 전쟁: 젠킨스의 귀 전쟁과 7년 전쟁의 서막 (War of Jenkins' Ear)


잘린 귀 하나가 어떻게 세계를 전쟁에 빠뜨렸나: 젠킨스의 귀 전쟁 이야기


의회에 등장한 절인 귀

1738년 어느 날, 영국 하원은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로버트 젠킨스(Robert Jenkins)라는 이름의 한 상선 선장이 의원들 앞에 나서, 끔찍한 물건이 담긴 병 하나를 꺼내 보였기 때문입니다. 

병 안에는 소금에 절여진 사람의 귀가 들어 있었습니다. 

바로 7년 전, 스페인 해안 경비대에게 잘린 자신의 귀였습니다.

젠킨스는 비통한 목소리로 스페인 지휘관이 귀를 자르며 내뱉었던 모욕적인 말을 전했습니다.

"이 귀를 당신네 왕에게 가져가, 만약 왕께서 이 자리에 계셨더라도 똑같이 대접해 드렸을 것이라고 전해라." (전승)

이 극적인 장면은 영국 전체의 분노에 불을 지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한 개인의 신체 훼손이라는 사건이 제국 간의 거대한 전쟁, 즉 '젠킨스의 귀 전쟁(War of Jenkins' Ear)'으로 번져나갈 수 있었을까요? 

이 이야기는 단순히 잘린 귀 하나에 대한 복수극이 아닙니다. 

제국의 야망, 경제적 이권, 그리고 국내 정치가 복잡하게 얽힌 시대의 서막을 연 사건이었습니다.


1. 불꽃: 한 선장의 귀, 그리고 분노한 제국

1.1. 카리브해의 조우

사건은 1731년, 서인도제도 인근 카리브해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영국의 상선 '레베카(Rebecca)'호를 이끌던 로버트 젠킨스 선장은 스페인 해안 경비대(Guarda-Costas)에 나포되었습니다. 

당시 영국 상인들은 막대한 관세를 피하기 위해 스페인령 식민지와 밀수를 벌이는 일이 잦았고, 스페인 해안 경비대는 이를 단속한다는 명분으로 영국 선박을 무차별적으로 수색하고 가혹하게 대했습니다.

젠킨스 선장 역시 밀수 혐의로 붙잡혔습니다. 

스페인 지휘관은 그를 배의 돛대에 묶고 귀 한쪽을 칼로 잘라버리는 잔혹한 행위를 저질렀습니다. 

이 끔찍한 사건은 당시 영국 상인들이 겪던 수모의 극적인 사례였습니다.


1.2. 7년 만의 증언

사건이 잊혀가던 7년 후인 1738년, 젠킨스는 영국 의회 위원회에 출석하여 자신의 경험을 증언했습니다. 

그는 의원들 앞에 자신이 보관해 온 잘린 귀를 내보이며, 그날의 참상을 생생하게 고발했습니다. 

그의 증언은 단순한 하소연을 넘어, 제국의 자존심에 상처 입은 모든 영국인의 분노를 대변하는 외침이었습니다.

"신사 여러분, 저를 이렇게 난도질한 후에 그들은 저를 죽이겠다고 위협했습니다. 저는 죽음을 예상하고 제 영혼은 신께, 제 사건의 복수는 조국에 맡겼습니다."

젠킨스의 증언은 단순한 개인의 비극을 넘어, 스페인에 대한 적개심을 최고조로 끌어올리는 강력한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이 잘린 귀는 이제 영국 전체의 분노와 복수심을 상징하게 되었습니다.


2. 불쏘시개: 폭발 직전의 영국, 무엇이 문제였나?

젠킨스의 귀가 역사의 무대에 극적으로 등장했지만, 이 이야기는 결코 귀 하나에서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불꽃이었을 뿐, 화약고는 수십 년에 걸쳐 채워지고 있었습니다. 

그 속에는 제국의 탐욕, 불법적인 부, 그리고 끓어오르는 정치적 야심이라는 세 가지 불안정한 재료가 있었습니다.


2.1. 진짜 이유: 무역, 밀수, 그리고 제국의 야망

모든 갈등의 뿌리에는 바다에 대한 두 제국의 근본적으로 다른 시각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스페인은 교황의 칙령을 근거로 신대륙의 바다를 자신들만의 '닫힌 바다(Mare Clausum)'로 여겼습니다. 

반면, 후발주자였던 영국은 모든 국가가 자유롭게 항해하고 무역할 권리가 있다는 '열린 바다(Mare Liberum)'를 주장하며 스페인의 독점권에 도전하고 있었습니다.


이 이념적 충돌은 '아시엔토(Asiento)'라는 무역 협정에서 구체화되었습니다. 

영국은 이 협정을 통해 스페인 식민지에 4,800명의 노예와 연간 500톤의 상품을 공급할 독점권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영국의 야심은 이 제한된 권리에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수많은 영국 밀수꾼들은 '열린 바다' 사상을 몸소 실천하듯, 합법적인 교역량을 훨씬 뛰어넘는 막대한 양의 상품을 스페인 식민지에 쏟아냈습니다.


이에 스페인은 '닫힌 바다'를 지키기 위해 해안 경비대(Guarda-Costas)를 동원해 영국 선박들을 가차 없이 나포하고 수색했습니다. 

젠킨스의 귀를 자른 사건은 바로 이 과정에서 벌어진 수많은 충돌 중 하나였습니다. 

영국 상인들의 분노가 들끓자, 이는 영국 내에서 완벽한 정치적 무기가 되었습니다.


당시 총리였던 로버트 월폴은 평화와 무역을 우선시하며 스페인과의 외교적 해결을 모색했습니다. 

하지만 윌리엄 피트가 이끄는 반대파 '애국당(Patriots)'은 월폴의 정책을 굴욕 외교라 비난하며, 젠킨스의 귀 사건을 이용해 대중의 맹목적인 애국심(징고이즘, Jingoism)을 자극했습니다. 

여기에 제국주의자 제임스 오글소프가 스페인령 플로리다에 맞서 건설한 '조지아' 식민지를 둘러싼 영토 분쟁까지 더해지면서, 반대파는 전쟁을 향한 여론을 부채질했습니다. 

이처럼 아시엔토 무역에서 시작된 경제적 갈등은 밀수와 단속을 거치며 대중의 분노로, 그리고 다시 국내 정치 투쟁의 연료로 번져나갔습니다.


젠킨스 선장이 총리 로버트 월폴에게 잘린 귀를 보여주는 만화

2.2. 평화를 위한 마지막 노력: 파르도 협약의 실패

전쟁의 기운이 짙어지자, 양국은 1739년 '파르도 협약(Convention of Pardo)'을 통해 마지막 외교적 타결을 시도했습니다. 

이 협약은 스페인이 영국에 일부 피해를 보상하는 내용을 담았지만, 영국의 밀수 문제나 영토 분쟁 같은 근본적인 갈등은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이 어정쩡한 협약은 양국에서 모두 비준되지 못하고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국내의 거센 여론과 정치적 공세에 밀린 월폴 총리는 마지못해 스페인에 대한 전쟁을 선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한 선장의 잘린 귀는 경제적 이익, 제국의 자존심, 그리고 치열한 국내 정치가 뒤얽힌 거대한 갈등의 상징이 되어, 영국을 피할 수 없는 전쟁의 길로 이끌었습니다.


3. 마침내 터진 전쟁: 영광과 참사

3.1. 손쉬운 첫 승리와 애국적 광기: 포르토벨로 함락

1739년 11월, 전쟁이 시작되자 에드워드 버논(Edward Vernon) 제독이 이끄는 영국 함대는 파나마의 스페인 무역항 '포르토벨로(Porto Bello)'를 기습 공격했습니다. 

스페인군의 방비가 허술했던 탓에 영국군은 최소한의 피해로 손쉽게 항구를 점령했습니다.


사무엘 스콧 의 포르토 벨로 점령 , 1740


이 승리 소식은 영국 전역을 애국적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었습니다. 

런던에는 '포르토벨로 로드(Portobello Road)'라는 지명이 생겨났고, 영국의 해상 지배를 찬양하는 유명한 애국 가곡 '룰, 브리타니아!(Rule, Britannia!)' 가 바로 이때 대중에게 공개되었습니다. 

영국은 승리에 취해 축배를 들었지만, 카리브해의 무더운 공기 속에서는 질병과 오만이라는 더 치명적인 적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3.2. 재앙으로 끝난 야심: 카르타헤나 공성전

1741년, 영국은 카리브해 최대의 스페인 요새 도시인 '카르타헤나(Cartagena)'를 점령하기 위해 전쟁 역사상 유례없는 대규모 원정군을 파견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반쪽 사나이(el Mediohombre)'라는 별명을 가진 스페인 사령관 블라스 데 레소(Blas de Lezo)였습니다. 

그는 이전 전투들에서 눈 하나, 팔 하나, 다리 하나를 잃은 백전노장이었습니다. 

최첨단 대함대와 '반쪽 사나이'의 대결이 임박해 있었습니다.


스페인 제독 블라스 데 레소 1741


구분
영국군 (지휘관: 에드워드 버논)
스페인군 (지휘관: 블라스 데 레소)
전력
전함/수송선 186척, 병력 약 28,000명
전함 6척, 병력 약 3,600명
결과
약 18,000명의 사상자 발생 후 대패
아주 적은 피해로 방어 성공


영국군은 압도적인 전력에도 불구하고 역사에 남을 처참한 패배를 맞았습니다. 

그 원인은 복합적이었습니다.


• 질병: 황열병, 이질 등 열대성 질병이 영국군 진영을 휩쓸어, 전투 사망자보다 훨씬 많은 병력을 앗아갔습니다.

• 지휘관 간의 불화: 해군 사령관 버논 제독과 육군 사령관 웬트워스 장군 간의 갈등으로 인해 작전은 번번이 실패했습니다.

• 스페인군의 노련한 방어: 블라스 데 레소는 불리한 전력에도 불구하고 지형을 이용한 교묘한 방어 전술로 영국의 거대한 침공군을 완벽하게 격퇴했습니다.


젠킨스 귀 전쟁 중 카리브해에서의 영국군 작전


이 전투에는 주목할 만한 또 다른 사실이 있습니다. 

영국군은 북아메리카 식민지에서 징집한 병력을 동원했는데, 이들은 영국군 기록에서 처음으로 '아메리카인(Americans)' 이라고 불렸습니다. 

하지만 영국 정규군은 이들을 멸시하고 노예처럼 취급했습니다. 

이 차별 대우는 아메리카 식민지인들에게 영국에 대한 깊은 불신과 분노를 심어주었고, 훗날 미국 독립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흥미롭게도, 이 참혹한 패배의 현장에는 훗날 미국 역사를 바꿀 가문의 인물이 있었습니다. 

바로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의 이복형인 로렌스 워싱턴(Lawrence Washington)입니다. 

비록 전투는 재앙으로 끝났지만, 로렌스는 버논 제독 개인에 대한 존경심을 잃지 않았고, 훗날 자신의 농장에 '마운트 버논(Mount Vernon)' 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제국의 가장 큰 실패 중 하나가 미래 독립 국가의 가장 상징적인 장소의 이름으로 남게 된 것입니다.

카르타헤나에서의 참패 이후 카리브해에서의 전쟁은 교착 상태에 빠졌습니다. 

그사이, 유럽 대륙에서는 이 국지전을 훨씬 더 거대한 국제전으로 몰고 갈 새로운 불씨가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산 펠리페 데 바라하스 요새 (카르타헤나)


4. 번지는 불길: 유럽 대륙 전체를 휩쓴 대전쟁으로

4.1.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의 발발

1740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오스트리아의 통치자였던 카를 6세가 아들 없이 사망했습니다. 

그는 생전에 '국사조칙'을 통해 딸인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a)의 왕위 계승을 유럽 각국으로부터 인정받아 두었습니다.


마리아 테레지아


하지만 그의 사후, 프로이센의 야심찬 군주 프리드리히 2세(Frederick II)는 이 약속을 깨고 오스트리아의 가장 부유한 영토인 슐레지엔(Silesia)을 침공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유럽의 강대국들이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마리아 테레지아의 계승을 문제 삼으며 개입하기 시작했고, 이것이 바로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1740-1748) 의 시작이었습니다.


4.2. 새로운 합종연횡

유럽 대륙에 새로운 전쟁이 발발하자, 기존의 대립 구도는 재편되었습니다.


• 영국과 오스트리아의 동맹: 스페인과 전쟁 중이던 영국은 스페인의 동맹국인 프랑스를 견제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오스트리아의 편에 섰습니다.

• 프랑스, 스페인, 프로이센의 동맹: 프랑스는 전통적인 경쟁자인 오스트리아와 영국을 동시에 압박하기 위해 프로이센, 스페인과 손을 잡았습니다.


1750년 유럽 지도.


이로써 영국과 스페인 간의 해상 분쟁이었던 '젠킨스의 귀 전쟁'은 유럽 대륙의 패권을 둘러싼 거대한 국제전인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의 일부로 완전히 흡수되었습니다.

8년에 걸친 지리한 소모전 끝에, 막대한 전쟁 비용에 지친 교전국들은 마침내 갈등을 끝내기 위해 협상 테이블에 앉게 되었습니다.


5. 어정쩡한 평화와 남겨진 불씨

5.1. 엑스라샤펠 조약과 그 한계

1748년, 각국은 '엑스라샤펠 조약(Treaty of Aix-la-Chapelle)'을 체결하며 전쟁을 종결했습니다. 

하지만 이 조약은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었습니다. 

프로이센은 전쟁의 원인이었던 슐레지엔 영유를 공식적으로 인정받았습니다. 

하지만 영국과 프랑스, 스페인 간의 식민지 및 무역 문제는 대부분 해결되지 않고 전쟁 이전의 상태(Status quo ante bellum) 로 되돌아갔습니다.

결국 이 조약은 갈등의 불씨를 그대로 남겨둔 '무장 휴전'에 불과했습니다. 

아무도 만족하지 못한 이 어정쩡한 평화는 더 큰 전쟁을 예고하고 있었습니다.


5.2. 전쟁의 진정한 유산

젠킨스의 귀 전쟁과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은 세계사에 세 가지 중요한 유산을 남겼습니다.

1. 새로운 갈등의 씨앗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는 슐레지엔을 되찾겠다는 복수심에 불탔습니다. 

이 미해결된 원한은 8년 뒤, 유럽뿐만 아니라 북아메리카와 인도까지 휩쓴 진정한 의미의 첫 세계대전, '7년 전쟁' 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습니다.

2. 해상 강국 영국의 부상 

비록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영국은 이 전쟁을 통해 해상에서의 우위를 더욱 공고히 했습니다. 

이는 19세기 '팍스 브리타니카(Pax Britannica)', 즉 영국이 세계를 지배하는 제국으로 발돋움하는 중요한 발판이 되었습니다.

3. 미국 독립의 서곡 

카르타헤나 전투 등에서 영국군으로부터 부당한 차별을 경험한 아메리카 식민지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자각하고 영국 본국에 대한 불만을 키웠습니다. 

이는 훗날 미국 독립 전쟁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귀 하나가 바꾼 세계의 지도

로버트 젠킨스의 잘린 귀는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한 시대의 욕망과 갈등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가장 강력한 '상징' 이자 '구실' 이었습니다. 

끓어오르는 제국의 팽창 욕구와 식민지를 둘러싼 경제적 이권 다툼이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젠킨스의 귀는 대중의 분노를 하나로 모으고 전쟁을 정당화하는 완벽한 도구가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카리브해에서 벌어진 한 선장의 수모는 유럽의 세력 균형을 뒤흔들고, 프로이센을 새로운 강국으로 부상시켰으며, 머나먼 북아메리카 대륙의 운명까지 바꾸는 거대한 나비효과를 일으켰습니다.

잘린 귀 하나가 세계의 지도를 바꾼, 역사상 가장 기묘하고도 중요한 전쟁 이야기입니다.


이 글은 ‘젠킨스의 귀 전쟁(War of Jenkins’ Ear)’과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7년 전쟁 사이의 연결 관계를 다룬 여러 역사 개설서·연구 논문·백과사전류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서사형 글입니다. 

젠킨스 선장의 귀 절단 사건, 아시엔토(Asiento) 노예무역 특권, 파르도 협약, 포르토벨로 함락과 카르타헤나 공성전, 엑스라샤펠 조약, 7년 전쟁으로 이어지는 국제 정세의 큰 흐름 자체는 사료와 연구 성과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다만 젠킨스가 귀를 병에 담아 의회에 가져왔다는 장면, 스페인 장교의 모욕적인 대사, 의회에서의 발언 내용, 각 전투 현장의 대화와 심리 묘사, 병력·피해 수치의 일부 정리는 독자 이해를 돕기 위한 요약·각색이며, 후대에 형성된 전승·해석을 반영한 부분도 있습니다. 

이 글은 학술 논문이나 정밀 군사사가 아니라, 18세기 영국·스페인 제국 경쟁을 입체적으로 느껴보시기 위한 ‘스토리형 역사 에세이’에 가깝습니다. 

보다 엄밀한 연대·수치·외교문서가 필요하신 경우, 전문 연구서와 1차 사료를 함께 참고해 주시길 권합니다.


This article recounts the War of Jenkins’ Ear, from Captain Jenkins’s severed ear and its propaganda use in Britain to the trade dispute with Spain, early naval victories, the Cartagena disaster, and the war’s absorption into the War of Austrian Succession and the road to the Seven Years’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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