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 로마의 왕이 되다: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 이야기
로마의 5대 왕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는 로마 역사의 흐름을 바꾼 설계자였다.
그는 목동들의 작은 마을이 언덕마다 흩어져 있던 로마를, 거대한 건축물과 질서 잡힌 제도를 갖춘 진짜 ‘도시’로 바꾸어 놓았다.
그리스인의 아들로 태어나 에트루리아에서 이방인 취급을 받던 그가 어떻게 로마의 왕이 되어 ‘위대한 로마’의 기틀을 닦았을까.
그의 이야기는, 로마가 작은 도시 국가에서 세계를 호령하는 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를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다.
그리스인의 아들, 에트루리아의 이방인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의 원래 이름은 ‘루코모’였다.
아버지는 그리스의 부유한 상업 도시 코린트 출신 상인 데마라투스, 어머니는 에트루리아의 유력 가문 출신 귀족 여성이었다.
루코모에게는 아룬스라는 형이 있었지만, 형이 아버지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면서 루코모는 아버지의 막대한 재산을 거의 다 물려받게 된다.
하지만 그의 삶은 순탄하지 않았다.
그가 자라난 에트루리아 도시 타르퀴니이에서 루코모는 늘 ‘외국인의 피가 섞인 사람’으로 취급되었다.
아버지가 그리스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아무리 부유하고 능력이 뛰어나도 도시의 최고 수준 공직에 오르기는 어렵다는 벽에 부딪혔다.
정치적 출세의 길이 막혀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루코모는 점점 분노와 답답함을 느끼게 된다.
결국 그는 결심한다.
고향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삶보다는, 새로운 곳에서 기회를 찾는 편이 낫다고 본 것이다.
그의 눈에 들어온 곳이 바로 로마였다.
당시 로마는 출신이 다르고 외국에서 온 사람이라도, 능력과 재산이 있다면 비교적 쉽게 받아들여 주는 개방적인 도시로 알려져 있었다.
야망에 불타던 루코모는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에트루리아에서는 피가 다르다고 막지만, 로마에서는 실력으로 평가한다고 하더군. 여기서 차별받느니, 로마로 가서 내 운명을 다시 만들어야겠다.”
그의 곁에는 남편의 비범한 운명을 미리 꿰뚫어 본 아내 타나퀼이 있었다.
타나퀼은 에트루리아에서 점술과 징조 해석으로 이름난 집안 출신이었고, 남편의 가장 큰 조력자이자 예언자였다.
하늘의 계시: 독수리와 아내의 예언
루코모와 타나퀼은 재산을 정리해 일행과 함께 로마로 향했다.
행렬이 티베르 강을 건너 로마의 야니쿨룸 언덕 근처에 이르렀을 때, 전승에 따르면 믿기 어려운 장면이 벌어진다.
갑자기 하늘에서 독수리 한 마리가 급강하해 루코모의 머리에서 모자를 낚아채더니,
높이 날아올라 잠시 맴돌다가 다시 내려와 마치 왕관을 씌우듯 그의 머리 위에 모자를 살짝 올려놓고 날아가 버린다.
에트루리아에서 징조를 해석하는 일에 익숙했던 타나퀼은 이 장면을 보고 단번에 이것이 평범한 우연이 아니라는 걸 알아챈다.
그녀는 남편의 손을 꼭 붙잡고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한다.
“이건 보통 징조가 아니에요. 하늘이 당신에게 왕의 자리를 예고한 거예요. 로마에 가면, 당신이 로마인들의 자유로운 선택으로 왕이 될 만한 사람이라는 걸 모두에게 보여줘야 해요.”
타나퀼의 해석은 루코모에게 강력한 확신을 심어 주었다.
그는 더 이상 에트루리아의 이방인이 아니라, 새로운 도시에서 스스로 운명을 개척할 왕의 후보라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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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르퀴니우스와 독수리 |
왕의 마음을 사로잡은 이방인
로마에 도착한 루코모는 자신의 이름부터 바꾼다.
에트루리아식 이름 대신, 그는 스스로를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라고 소개한다.
출신은 다르지만 로마 사회에 완전히 들어가 그 일부가 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타르퀴니우스가 왕위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은 크게 세 단계로 정리할 수 있다.
1. 왕과의 첫 만남
타르퀴니우스는 당시 로마의 4대 왕 안쿠스 마르키우스를 찾아간다.
그는 자신의 출신과 이력을 솔직하게 설명하고, 에트루리아에서 가져온 재산과 인맥을 로마의 공익을 위해 기꺼이 활용하겠다고 이야기한다.
한마디로 “재산과 능력을 로마를 위해 쓰겠다”는 제안이었다.
안쿠스 왕은 그의 자신감, 말투, 태도, 그리고 그가 가진 자원을 보고 큰 호감을 느낀다.
타르퀴니우스는 이 만남을 통해 왕실과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로마 엘리트 사회로 들어갈 발판을 마련한다.
2. 신뢰 구축
타르퀴니우스는 단순한 부자가 아니라, 왕의 곁에서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조언자이자 동료로 행동한다.
전쟁이 일어나면 직접 군대와 함께 나가 가장 용감하게 싸우고, 평화 시기에는 왕이 국정을 논의할 때마다 가장 현실적이고 현명한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그는 왕의 공적·사적 일에 모두 참여하면서 점점 왕의 ‘오른팔’이 된다.
동시에, 타르퀴니우스는 사람들의 마음을 얻는 데도 능숙했다.
정중한 인사, 친절한 말, 작은 호의, 필요할 때 아끼지 않고 쓰는 돈 덕분에 그는 귀족뿐 아니라 평민들에게까지 “매력적인 외국인”으로 알려지게 된다.
3. 왕위 쟁취
시간이 흘러 안쿠스 마르키우스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로마에는 후계 문제가 떠오른다.
왕에게는 아들들이 있었지만 아직 젊었고, 국가를 맡기기에 불안하다고 보는 시각도 있었다.
타르퀴니우스는 이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왕자들이 장례 이후 한동안 로마를 떠나 있도록 만들고, 그 사이에 시민 민회(코미티아 쿠리아타)에 나가 열정적인 연설을 펼친다.
“나는 로마의 전쟁에서 함께 싸웠고, 왕과 함께 국정을 논의해 온 사람이다. 로마가 더 강해지려면, 출신보다 능력이 중요한 시대가 와야 한다. 나 타르퀴니우스에게 로마를 맡겨 달라.”
전승에 따르면, 그는 이렇게 공개적으로 사람들 앞에서 지지를 호소하고 표를 얻으려 한 첫 번째 왕으로 기억된다.
로마 시민들은 그의 연설과 업적에 감탄했고, 결국 타르퀴니우스는 압도적인 지지로 로마의 5대 왕으로 선출된다.
그가 왕위에 오르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은 자신의 진짜 야망을 실현하기 위한 준비였다.
로마의 국경을 튼튼히 지키고, 거대한 건설 사업을 추진할 재정과 노동력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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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시우스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의 초상화 |
로마의 영토를 넓힌 정복 군주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는 뛰어난 군사 지도자이기도 했다.
그는 로마의 영토를 크게 넓히고, 주변 부족들을 차례로 굴복시킨 정복 군주로 기억된다.
• 라틴족과의 전쟁
그는 라틴족 도시들을 상대로 전쟁을 벌여 아피올라이를 비롯한 여러 도시를 정복한다.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과 포로는 로마의 국고와 노동력을 크게 늘렸고, 이는 곧이어 진행될 거대한 건설 사업의 재원이 된다.
• 사비니족과의 전쟁
사비니족과의 전쟁은 몇 년 동안 이어지는 지루한 싸움이었다.
타르퀴니우스는 단순 힘싸움으로는 결판을 내기 어렵다고 보고 기만 전술을 선택한다.
전투가 한창일 때, 미리 우회시켜 둔 로마 군대가 사비니군의 배후에서 갑자기 나타나 공격한다.
앞과 뒤에서 동시에 공격을 받은 사비니족은 공포에 질려 진영을 버리고 달아나고, 전세는 순식간에 기울어 버린다.
고대 전승 가운데에는, 밤중에 배를 불태워 강에 흘려보내 적을 혼란시키고 결정적인 승리를 얻었다는 버전도 전해진다.
어떤 세부 묘사를 따르든, 핵심은 타르퀴니우스가 기만과 기습을 활용해 전쟁을 끝낸 왕이라는 점이다.
큰 패배를 겪은 사비니족은 결국 로마에 항복하게 된다.
• 에트루리아 도시들과의 전쟁
흥미롭게도, 에트루리아에서 인정받지 못해 떠나야 했던 타르퀴니우스는 이제 로마의 왕이 되어 에트루리아 도시들과 맞서게 된다.
그는 로마에 대항하던 여러 에트루리아 도시들을 차례로 굴복시키고, 로마를 중부 이탈리아에서 무시할 수 없는 군사 강자로 끌어올린다.
이처럼 전쟁에서의 승리는 로마에 막대한 부와 인력을 안겨 주었다.
타르퀴니우스는 이 자원을 바탕으로, 자신이 꿈꾸던 새로운 로마를 만들기 위한 거대한 건설 사업을 시작한다.
위대한 도시를 건설하다
국경을 지키고 국고를 채운 타르퀴니우스는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간 목표에 착수한다.
단순히 로마를 통치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로마를 직접 ‘재창조’하려는 야망이었다.
그의 통치 아래 진행된 건설 사업은 로마의 모습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중에서도 세 가지 업적은 오늘날까지도 로마를 상징하는 유산으로 남아 있다.
1. 클로아카 막시마(Cloaca Maxima)
타르퀴니우스는 먼저 로마 저지대의 습지와 물 문제에 눈을 돌린다.
그는 거대한 배수·하수도 시스템인 클로아카 막시마를 건설해 저지대의 물을 빼내고 땅을 단단하게 다졌다.
이 공사 덕분에 사람들은 그곳을 도심의 중심 광장인 포로 로마노로 정비할 수 있었다.
클로아카 막시마는 도시 위생을 크게 개선했을 뿐 아니라, 로마가 ‘언덕 위 마을들의 집합’에서 ‘하나의 도시’로 변신하는 데 결정적인 기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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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로아카 막시마 |
2. 키르쿠스 막시무스(Circus Maximus)
타르퀴니우스는 로마 시민에게 볼거리와 오락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전차 경주를 위한 로마 최초의 대규모 경기장, 키르쿠스 막시무스의 초석을 놓는다.
키르쿠스 막시무스는 이후 수세기 동안 로마의 대중 오락 중심지가 된다.
황제들은 이곳에서 화려한 경기와 퍼레이드를 열며 민심을 얻으려 했고, ‘빵과 서커스’라는 로마 정치의 상징적인 장면 상당수가 이 경기장을 배경으로 펼쳐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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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키르쿠스 막시무스 복원도 |
3. 유피테르 신전(Temple of Jupiter Optimus Maximus)
타르퀴니우스는 로마의 종교적 중심을 새로 세우는 일에도 착수한다.
그는 카피톨리노 언덕 위에 로마의 주신 유피테르를 모시는 거대한 신전을 짓기 시작한다.
본격적인 완공은 후대 왕에게 넘어가지만, 기초 공사와 설계, 방향을 잡은 것은 타르퀴니우스의 작품이다.
특히 사비니와의 전쟁에서 거둔 전리품이 이 신전 공사의 중요한 재원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카피톨리노 언덕의 유피테르 신전은 이후 로마의 승리와 국가 권위를 상징하는 장소가 된다.
이처럼 타르퀴니우스의 건설·정비 사업은 로마를 물리적으로, 시각적으로 완전히 다른 도시로 바꾸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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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원전 509년 유피테르 옵티무스 막시무스 신전의 최초 추측 모델 |
야망의 비극적인 최후
타르퀴니우스는 오랫동안 로마를 통치하다가 노년에 접어든다.
그동안 쫓겨나듯 왕위를 빼앗겼다고 느끼던 사람들도 있었다.
바로 4대 왕 안쿠스 마르키우스의 두 아들이었다.
두 왕자는 자신들이 이어받았어야 할 왕위를 타르퀴니우스가 가로챘다고 믿었고, 오랜 세월 동안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복수의 때를 노리고 있었다.
어느 날, 두 사람은 암살자를 보내 계획을 실행에 옮긴다.
암살자 둘은 시골에서 온 사람인 것처럼 가장하고, 서로 땅 문제로 다투는 농부인 척하며 왕 앞에 나아간다.
그들은 왕 앞에서 일부러 시끄럽게 싸움을 벌이고, 서로가 옳다며 큰소리를 치다가 타르퀴니우스에게 중재를 요청한다.
마음씨가 너그러워져 있던 노년의 왕은 그들을 진정시키려 다가갔고, 바로 그 순간이었다.
암살자 중 한 명이 숨겨 온 흉기를 꺼내 왕의 머리를 내리친다.
예고 없이 벌어진 기습에 왕은 크게 쓰러지고, 곧 치명상을 입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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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의 비참한 죽음 |
궁전은 순식간에 혼란에 빠진다.
그러나 왕비 타나퀼은 침착함을 잃지 않는다.
그녀는 우선 왕의 죽음을 주변에 알리지 않고 숨긴다.
그리고 남편이 특히 아끼던 사위 세르비우스 툴리우스를 급히 불러,
“왕이 중상을 입었고, 회복될 때까지 네가 임시로 나라를 맡아야 한다”고 지시한다.
타나퀼의 신속한 판단 덕분에 권력 공백 상태는 최소화된다.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세르비우스 툴리우스가 왕의 뜻을 이어 섭정을 맡는다고 생각했고, 조금 뒤 그는 다음 왕으로 정식 즉위하게 된다.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의 삶은 암살이라는 비극으로 끝났지만, 그가 로마에 남긴 유산만큼은 그 뒤의 세대들에게 계속 이어졌다.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의 유산: 그가 로마에 남긴 것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는 단순한 정복 군주나 건설자가 아니었다.
그의 통치는 로마의 정체성과 방향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진정한 ‘도시’의 탄생
그가 추진한 대규모 건설 사업, 특히 클로아카 막시마와 포로 로마노 정비 덕분에 로마는 언덕 위의 작은 마을들이 모여 있는 느슨한 집합체에서 벗어나, 광장과 공공 건축물을 갖춘 하나의 도시 국가로 거듭났다.
훗날 로마 제국의 수도가 되는 도시의 물리적 골격이 이 시기에 마련된 셈이다.
외부에 열린 로마의 기틀
에트루리아 출신이자 ‘혼혈’ 이방인이었던 타르퀴니우스가 왕위에 올랐다는 사실 자체가, 로마가 출신과 혈통보다는 능력과 공헌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는 상징이다.
물론 로마도 시간이 지나면서 배타성과 보수성이 강해지는 시기가 있었지만, 초기 로마가 외부 인재를 받아들이는 개방성을 갖고 있었다는 점은 그의 사례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러한 개방성은 후에 로마가 다양한 민족과 문화를 끌어안는 대제국으로 성장하는 데 중요한 밑바탕이 된다.
‘위대한 로마’의 상징 도입
타르퀴니우스는 에트루리아의 문화를 로마에 적극적으로 들여온 왕이기도 했다.
그는 에트루리아식 의례와 상징들을 로마 정치·군사 제도에 녹여 넣었다.
네 마리 말이 끄는 황금 마차를 타고 행진하는 개선식, 금실로 수놓은 토가와 장식이 화려한 투니카 팔마타, 고위 정무관의 권위를 상징하는 쿠룰리스 의자, 릭토르가 어깨에 메고 다니던 파스케스(도끼가 박힌 막대 다발), 군사용 트럼펫인 투바 등은 이후 ‘로마의 위엄’을 시각적으로 보여 주는 상징이 된다.
이 상징들 상당수의 기원이 에트루리아 문화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타르퀴니우스는 로마의 군사력뿐 아니라 이미지와 권위의 언어까지 설계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의 이야기는, 한 이방인이 어떻게 로마의 왕이 되어 도시의 얼굴과 제국의 상징을 바꾸어 놓았는지를 보여준다.
그는 피와 출신의 벽에 가로막힌 청년에서 출발해, 전쟁과 건설, 제도와 상징을 통해 로마를 다시 설계한 왕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그가 남긴 질문은 지금도 유효하다.
“한 사회는 얼마나 외부의 사람과 문화를 받아들일 수 있는가.”
“도시와 국가의 ‘위대함’은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로마의 돌과 하수도, 경기장과 신전 위에 새겨진 그의 답은, 2,60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생각할 거리를 던져 준다.
이 글은 리비우스, 디오니시오스 등 고대 로마 사가들이 전하는 이야기를 기본 뼈대로 삼아,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의 생애와 업적을 소설처럼 재구성한 서사입니다.
전쟁 장면이나 대사, 심리 묘사는 당시 분위기와 인물의 성격을 살리기 위해 상상력을 보태 어레이징한 부분이 있고, 연대·세부 전술·암살 장면의 디테일 등은 서로 다른 전승을 절충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 글은 엄밀한 의미의 학술 논문이나 연대기라기보다, 로마 초기 왕정 시대를 이해하기 위한 ‘드라마형 해설’에 가깝습니다.
구체적인 연대·원문 인용·주석이 필요한 독자는 리비우스의 『로마사』, 디오니시오스의 『로마 고대사』와 현대 연구서를 함께 참고하는 편이 좋습니다.
This article retells the legend of Lucius Tarquinius Priscus, an outsider of Greek-Etruscan origin who left Tarquinii, won the favor of king Ancus Marcius in Rome, campaigned for the throne, expanded Rome through wars with Latins, Sabines and Etruscans, built the Cloaca Maxima, Circus Maximus and Jupiter’s temple, and died in an assassination that paved the way for Servius Tulli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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