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오천축국전으로 읽는 혜초의 인도·실크로드 여행: 1,300년 전 신라 청년의 세계 일주 (Hyecho)


세계를 향한 위대한 발걸음: 신라 청년 혜초의 모험 이야기


1. 머나먼 나라를 꿈꾼 신라의 젊은 스님

1.1. 호기심 많은 청년, 혜초

지금으로부터 약 1,300년 전,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드넓은 세상을 향한 꿈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 중심에는 혜초(慧超, 704~787)라는 호기심 많은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당시 신라의 젊은이들에게 당나라는 새로운 학문과 문물을 배울 수 있는 기회의 땅이었고, 당나라 유학은 최고의 엘리트 코스로 여겨졌습니다.


혜초 역시 더 넓은 세상을 배우고자 하는 열망을 품고 10대의 어린 나이에 당나라로 향하는 배에 몸을 실었습니다. (추정)

그는 원광, 자장과 같은 위대한 선배 스님들처럼 더 큰 가르침을 얻고자 하는 뜨거운 마음을 안고 있었을 것입니다.


1.2. 더 큰 가르침을 찾아서

당나라에 도착한 혜초는 남인도에서 온 위대한 스승, 금강지(金剛智)를 만나 그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혜초는 스승의 깊은 가르침 아래 밀교(密敎)라는 새로운 불교 사상을 배우며 지식의 지평을 넓혀갔습니다. 

하지만 경전을 통해 배우는 것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깊은 갈증이 그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혜초는 스승에게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혜초: "스승님, 부처님의 위대한 가르침을 경전으로 배우고 있지만, 제 마음속 갈증은 채워지지 않습니다. 진정한 깨달음이란 무엇입니까?"

금강지: "혜초야, 진정한 깨달음은 책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부처님께서 직접 걸으셨던 땅, 진리의 본고장인 천축(天竺, 지금의 인도)으로 떠나보는 것은 어떻겠느냐?"


스승의 권유는 혜초의 마음에 큰 불을 지폈습니다. 

하지만 그 길은 보통 각오로는 나설 수 없는 죽음의 길이었습니다. 

당시 당나라로 유학 온 신라 스님 180명 중 15명이 인도로 떠났는데, 그중 무려 10명이 길 위에서 목숨을 잃고 고향으로 돌아온 사람은 단 5명뿐이었으니까요. (추정)

3명 중 2명이 돌아오지 못하는 험난한 여정이었습니다.

그러나 깨달음을 향한 혜초의 열망은 그 어떤 두려움보다 강했습니다. 

마침내 723년경, 혜초는 그 누구도 선뜻 나서지 못했던 위대한 도전을 결심합니다. (추정)

그렇게 혜초는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을 향해 첫걸음을 내디뎠습니다. 

그의 앞에는 과연 어떤 놀라운 세상이 기다리고 있었을까요?


2. 망망대해를 건너 부처님의 땅으로

2.1. 바닷길에 오르다

혜초는 중국 남쪽의 항구 도시 광저우에서 배를 타고 인도로 향했습니다.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을 바라보며 그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거친 파도가 배를 집어삼킬 듯 덮쳐오는 밤이면, 머나먼 고향 신라에 있는 가족들을 그리며 외로움과 두려움에 떨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부처님의 땅을 직접 밟고, 진정한 깨달음을 얻겠다는 굳은 의지가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2.2. 고향을 그리는 노래

낯선 땅에서의 외로운 여행길, 혜초는 달 밝은 밤하늘을 보며 고향 신라(계림, 鷄林)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시로 남겼습니다. 

그의 시에는 낯선 땅을 홀로 여행하는 젊은 구도자의 애틋한 심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달 밝은 밤에 고향길을 바라보니 뜬구름은 너울너울 돌아가네. 

그 편에 감히 편지 한 장 부쳐 보지만 바람이 거세어 화답이 안 들리는구나 

내 나라는 하늘가 북쪽에 있고 남의 나라는 땅 끝 서쪽에 있네. 

일남에는 기러기마저 없으니 누가 소식 전하러 계림으로 날아가리.


이 시는 단순한 향수병을 넘어, 문명의 끝자락에 홀로 선 젊은 탐험가의 외로움과 인간적인 고뇌를 보여줍니다. 

그는 진리를 찾아 나선 용감한 구도자였지만, 동시에 고향을 그리워하는 감성 깊은 시인이기도 했습니다. 

머나먼 이국땅에서 소식조차 전할 길 없는 그의 마음이 절절하게 느껴지지 않나요?


2.3. 처음 만난 인도의 모습

오랜 항해 끝에 혜초는 마침내 동인도에 도착했습니다. 

그의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모든 것이 낯설고 신기했습니다. 

특히 그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옷을 거의 입지 않은 사람들의 모습이었습니다.


혜초: "아니, 이보시오. 어찌하여 다들 그렇게 벌거벗고 다니시오? 날이 덥기 때문이오?"

인도인: "옷을 만들려면 누에를 죽여 비단을 얻거나, 식물의 생명을 해쳐야 하지 않소. 우리는 불필요한 살생을 줄이기 위해 이렇게 지낸답니다."


혜초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겉모습만 보고 섣불리 판단했던 자신이 부끄러워졌습니다. 

일상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혜초는 깊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마침내 부처님의 땅에 도착한 혜초는 본격적으로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 인도의 다섯 나라, 즉 오천축국(五天竺國)을 여행하기 시작했습니다.


3.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 걷다

3.1. 위대한 불교 성지를 찾아서

혜초는 부처님의 탄생지인 룸비니를 비롯한 불교 8대 성지를 모두 순례하며 깊은 감동을 느꼈습니다.

특히 다음 세 곳에서의 경험은 그의 마음에 깊은 울림을 남겼습니다.


• 쿠시나가라: 부처님께서 모든 번뇌를 벗고 평온의 경지, 즉 열반에 드신 곳입니다. 

혜초가 도착했을 때 이곳은 이미 황폐해져 아무도 살지 않는 폐허와 같았습니다. 

위대한 성인이 마지막을 맞이한 장소가 쓸쓸하게 버려진 것을 보며 그는 깊은 무상함을 느꼈을 것입니다.

• 바라나시(녹야원):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은 후, 다섯 명의 제자에게 처음으로 진리의 가르침을 펼치신 곳입니다. 

혜초는 이곳에 서서 2,500년 전 울려 퍼졌을 부처님의 첫 설법을 상상하며 가슴 벅찬 감동을 느꼈습니다.

• 부다가야: 부처님께서 보리수 아래에서 위대한 깨달음을 얻으신 곳입니다. 

이곳을 찾은 혜초는 평생의 소원을 이룬 기쁨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오랜 세월을 겪어 겨우 이곳에 왔으니 어찌 다시 뵙겠다는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겠는가. 

바로 이 아침에 내 몸으로 직접 뵈었도다.


머나먼 길을 걸어 마침내 성지에 도착한 그의 벅찬 감정이 생생하게 담겨 있습니다.


3.2. 사라져가는 불교의 빛

혜초는 인도 땅을 걸으며 신라와는 다른 점들을 꼼꼼히 기록했습니다. 

놀랍게도 이곳에는 죄인을 가두는 감옥이나 매질하는 형벌이 없었고, 죄의 무게에 따라 벌금을 물릴 뿐이었죠. 

사람들은 살생을 싫어하여 시장에서 고기를 팔지 않았고, 집집마다 우유를 얻을 수 있는 소를 소중히 기르는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기후가 따뜻해 서리와 눈이 없고, 사람들은 주로 쌀과 떡, 우유를 먹고 지냈습니다.


하지만 혜초의 눈에 비친 인도는 안타까움의 땅이기도 했습니다. 

불교의 발상지인 바라나시에서조차 불교는 힘을 잃고 힌두교가 번성하고 있었습니다. 

부처님의 영광을 확인하러 온 땅에서 불교의 쇠락을 목격한 젊은 구도승의 마음은 무척이나 안타까웠을 것입니다.


3.3. 세상은 넓고 신기한 일은 많다

혜초의 여행은 단순한 성지 순례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서쪽으로 더 나아가 페르시아(이란)와 바미안(아프가니스탄) 등에서 다양한 문화를 마주했습니다.


• 페르시아에서는 불을 숭배하는 배화교를 믿고, 어머니나 자매와 결혼하는 독특한 풍습을 목격했습니다.

• 바미안에서는 여러 형제가 한 명의 아내를 맞는 풍습이 있다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이처럼 혜초는 자신과 다른 문화를 편견 없이 바라보고 기록하며, 단순한 순례자를 넘어 다양한 문화를 체험하는 진정한 모험가이자 여행가의 면모를 보여주었습니다.

인도에서의 순례를 마친 혜초는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왔던 바닷길이 아닌, 더 험하고 멀지만 새로운 세상으로 이어지는 육로를 선택했습니다.


4. 실크로드를 넘어 다시 당나라로

4.1. 세계의 지붕을 넘다

혜초의 귀환길은 또 다른 위대한 도전이었습니다. 

그는 간다라와 아프가니스탄을 거쳐 '세계의 지붕'이라 불리는 파미르 고원을 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가 선택한 길은 동서양의 문명이 오가던 실크로드였지만, 그만큼 험난하고 위험한 길이었습니다.

눈앞에는 거대한 설산이 끝없이 펼쳐져 있고, 발밑으로는 모래바람이 휘몰아치는 사막이 이어졌습니다. 

인적 하나 없는 죽음의 땅에서 길을 알려주는 것은 오직 먼저 지나가다 스러져간 사람들의 하얀 해골뿐이었습니다. 

혜초는 강인한 의지와 용기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며 그 끔찍한 풍경을 견뎌냈습니다.


혜초의 여정


4.2. 4년간의 대장정을 마치다

마침내 727년 11월 상순, 혜초는 당나라의 국경인 안서(쿠차)에 도착했습니다. 

중국 광저우를 떠난 지 4년 만이었습니다. 

2만 킬로미터에 달하는 길고 긴 여정의 끝에서, 그는 벅찬 감격의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놀랍게도 "개원 15년(727년) 11월 상순에 안서에 이르렀다"는 이 기록은 그의 여행기 전체에서 유일하게 정확한 날짜가 적힌 부분이기도 합니다.

혜초는 이 위대한 여행의 모든 것을 『왕오천축국전』이라는 책에 담았습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 위대한 기록은 세상에서 완전히 잊히고 맙니다.


5. 1,200년 만에 다시 깨어난 이야기

5.1. 어둠 속에 잠든 위대한 기록

4년간의 대장정을 마친 혜초는 그토록 그리워하던 고향 신라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는 당나라에 남아 스승 금강지, 불공과 함께 불경을 연구하고 번역하는 일에 평생을 바쳤고, 그곳에서 조용히 생을 마감했습니다. (논쟁)

그의 분신과도 같은 책, 『왕오천축국전』 역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혔습니다. 

그렇게 1,200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이 위대한 기록은 중국 둔황의 막고굴(천불동)이라는 석굴 깊은 곳에서 먼지에 덮인 채 잠들어 있었습니다.


5.2. 운명적인 발견

시간은 흘러 1908년 3월, 프랑스의 탐험가 폴 펠리오(Paul Pelliot)가 둔황의 막고굴을 탐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장경동'이라 불리는 작은 석굴에서 수만 점의 고문서 더미를 발견했습니다. 

며칠 밤낮으로 문서들을 살피던 그의 눈에 낡은 두루마리 하나가 들어왔습니다.


펠리오의 손에 들린 것은 앞뒤가 모두 찢겨 나가 제목도, 저자 이름도 알 수 없는 낡은 두루마리였습니다. 

닥종이 아홉 장을 이어 붙인 이 필사본은 1,200년의 세월을 견뎌냈지만, 그 시작과 끝을 잃어버린 채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있었습니다.

펠리오는 이 낡은 두루마리가 평범한 문서가 아님을 직감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알고 있던 불교 백과사전 『일체경음의』의 내용을 떠올렸습니다. 

그 책에는 '혜초'라는 신라 스님이 쓴 『왕오천축국전』이라는 책의 어휘들이 설명되어 있었는데, 눈앞의 두루마리에 나오는 단어와 순서가 놀랍도록 일치했던 것입니다.

마치 한 편의 영화처럼, 1,200년간 어둠 속에 잠들어 있던 신라 스님 혜초의 위대한 기록이 세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습니다.

이렇게 세상에 다시 나온 『왕오천축국전』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왜 우리는 1,300년 전 한 젊은 스님의 여행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할까요?


왕오천축국전


6. 혜초가 우리에게 남긴 것

6.1. 세계 4대 여행기, 그 가장 오래된 기록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은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오도릭의 『동유기』,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와 함께 세계 4대 여행기로 꼽힙니다. 

특히 마르코 폴로보다 무려 500년이나 앞서 쓰인,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여행기 중 하나라는 점에서 그 가치가 더욱 빛납니다.


이 낡은 두루마리가 그토록 위대한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 핵심 이유 1: 8세기 현장의 유일한 증언

- 8세기 인도와 중앙아시아의 정치, 문화, 풍습을 생생하게 기록한 세상에 단 하나뿐인 기록입니다. 

스스로 역사를 기록하지 않았던 인도인들에게 자신들의 8세기 모습을 알려주는 소중한 자료이기도 합니다.

• 핵심 이유 2: 바다와 육지를 아우른 입체적 기록

- 다른 여행기들이 주로 육로 혹은 해로 한쪽의 경험만 담고 있는 반면, 『왕오천축국전』은 갈 때는 바닷길, 올 때는 육로(실크로드)를 이용한 양쪽의 경험을 모두 담고 있어 그 가치가 독보적입니다.

• 핵심 이유 3: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보다 500년이나 앞선,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여행기 중 하나입니다.

- 13~14세기에 쓰인 다른 세계적인 여행기들보다 5세기나 앞선 가장 오래된 기록 중 하나로서, 고대 동서 문명 교류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 빼놓을 수 없는 귀중한 사료입니다.


6.2. 위대한 한국인, 최초의 세계인

혜초는 단순히 불교를 공부한 스님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미지의 세계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용감한 탐험가였고, 다른 문화를 편견 없이 존중하고 기록한 위대한 여행가였습니다. 

또한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시로 남긴 감성 깊은 시인이기도 했습니다.


종교와 문화의 경계를 넘어 저 멀리 아랍 세계까지 경험하고 돌아온 혜초. 

그는 우리 역사상 '최초의 세계인' 이자, '문명 교류 사회의 개척자' 였습니다. 

1,300년 전, 더 넓은 세상을 향해 위대한 발걸음을 내디뎠던 신라의 젊은 스님 혜초는 오늘날 우리에게 깊은 자부심과 함께 미지의 세계를 향해 나아갈 용기와 도전 정신을 일깨워주는 진정한 '위대한 한국인' 입니다.


이 글은 『왕오천축국전』과 국내외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신라 승려 혜초의 여정을 소설적 장면과 대사로 풀어 쓴 이야기입니다. 

인물의 심리와 대화, 일부 상황 묘사는 사료의 빈틈을 메우기 위한 상상에 기대었으나, 연대·지명·사실 관계는 확인 가능한 범위 안에서 최대한 검증하여 서술하였습니다. 

보다 엄밀한 연구나 학술 정보를 원하시는 분들께서는 관련 논문과 전공 서적을 함께 참고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This essay follows Hyecho, an 8th-century Silla monk who left Korea as a teenager, studied esoteric Buddhism in Tang China, then sailed from Guangzhou to India to visit the Buddha’s sacred sites. 

He faced dangerous seas and deserts, observed Indian society and the fading of Buddhism, and pushed west through Central Asia and Persia before crossing the Pamirs back into Tang in 727. 

There he wrote “Wang ocheonchukguk jeon,” a vivid account of roughly four years of travel by sea and land. 

Hidden for 1,200 years in a cave at Dunhuang and rediscovered in the 20th century, it is now hailed as one of the world’s earliest travelogues, revealing Hyecho as a pioneering “world citizen” and bridge between civiliza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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