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더미 속의 기적: 1902년 몽펠레 화산 생존자 이야기
카리브해의 낙원, 생피에르
1902년 이전, 카리브해에 떠 있는 프랑스령 마르티니크섬의 생피에르(St. Pierre)시는 '서인도 제도의 파리'라 불릴 만큼 눈부신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짙푸른 코발트빛 바다를 배경으로 우아한 공공 건물과 극장, 활기 넘치는 상업 지구가 어우러진 이곳은 유럽인들에게도 사랑받는 열대의 낙원이었다.
도시의 북쪽으로는 해발 1,397m의 몽펠레 화산이 섬 전체를 평화롭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울창한 열대 식생으로 뒤덮인 그 산은 아름다운 풍경의 일부였을 뿐, 아무도 그 산의 심장이 다시 뜨겁게 타오를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평화로운 풍경은 곧 깨어질 운명의 서곡에 불과했다.
1. 재앙의 전조: 무시된 경고들
1902년 봄, 몽펠레는 잠에서 깨어나 섬뜩한 속삭임을 보내기 시작했다.
4월 초, 산 정상에서 유황 수증기가 피어오르고 작은 지진이 감지되었으며, 곧이어 화산재 섞인 비가 내렸다.
주민들은 과거에도 몇 차례 겪었던 작은 소동으로 여기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러나 5월에 들어서자, 불길한 속삭임은 공포의 비명으로 바뀌었다.
도시 전체를 뒤덮은 독한 유황 냄새에 하늘을 날던 새들이 질식해 땅으로 떨어졌다.
설상가상으로 화산 경사면에서 쫓겨난 길이 30cm에 달하는 거대한 지네와 독사 떼가 도시로 몰려들었다.
이 기괴하고 끔찍한 침공으로 50여 명의 주민과 수많은 가축이 목숨을 잃자, 도시의 불안은 걷잡을 수 없는 공포로 번져나갔다.
마침내 5월 5일, 결정적인 경고가 찾아왔다.
분화구의 호수(Etang Sec) 가장자리가 무너지며 끓어오르던 뜨거운 물이 쏟아져 내린 것이다.
이 물은 화산재와 뒤섞여 거대한 화산 이류(라하르)가 되어 블랑 강을 따라 시속 100km에 가까운 속도로 돌진했다.
이 진흙 급류는 강 하구에 있던 럼 양조장을 덮쳐, 그곳에서 일하던 인부 23명을 순식간에 매몰시켰다.
이 모든 끔찍한 징조에도 불구하고, 당시 마르티니크의 주지사였던 루이 무테(Louis Mouttet)는 주민들의 불안을 잠재우는 데만 급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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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이 기욤 무테 |
5월 11일로 예정된 선거에서 재선을 노리던 그는, 대피령이 선거에 미칠 악영향을 우려했다. (논쟁)
그는 지질학자들의 대피 권고를 "터무니없는 소리"라며 묵살하고, 심지어 "전혀 걱정할 필요 없다"는 내용의 전단지를 배포하며 주민들을 안심시키려 했다.
그의 치명적인 도박은 수만 명의 목숨을 제물로 삼는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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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산 폭발 이전의 생피에르시. |
2. 운명의 날: 1902년 5월 8일, 지옥의 문이 열리다
1902년 5월 8일 아침 7시 52분, 주님 승천 대축일을 맞아 성당의 종이 울려 퍼지던 그 순간, 몽펠레 화산은 지옥의 문을 열었다.
산 정상에서 버섯구름이 치솟으며 발생한 거대한 굉음과 함께, 인류가 처음 목격하는 끔찍한 재앙이 시작되었다.
화산이 토해낸 것은 단순한 화산재가 아니었다.
당시 과학계에 알려지지 않았던 공포, 훗날 이 재앙을 연구한 학자들에 의해 ‘타오르는 구름’이라는 의미의 화산쇄설류(nuée ardente)라 명명된 죽음의 현상이었다.
섭씨 최대 1,000도에 달하는 초고온의 가스와 화산재, 암석 파편이 뒤섞인 이 죽음의 구름은 시속 100km를 훌쩍 넘는 허리케인 같은 속도로 산비탈을 따라 생피에르시를 향해 돌진했다.
단 10분도 채 되지 않아 도시 전체가 화산쇄설류에 집어삼켜졌다.
1미터 두께의 석조 벽은 산산조각 났고, 철제 기둥은 엿가락처럼 휘었다.
도시에 보관되어 있던 수천 개의 럼주 통이 연쇄적으로 폭발하며 불의 강을 만들어냈고, 거리는 순식간에 아비규환으로 변했다.
약 3만 명의 사람들이 있던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순식간에 생피에르는 죽음의 도시가 되었다.
그러나 모든 논리와 희망이 사라진 그 고요한 잿더미 속에서, 몇몇 희미한 심장 소리가 기적처럼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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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폭발 뒤 생피에르시. |
3. 지옥에서 살아남은 사람들
흔히 몽펠레 화산 폭발의 생존자는 단 두세 명뿐이라는 신화가 전해진다.
그러나 이는 오해의 소지가 있다.
지질학자 알윈 스카스(Alwyn Scarth)의 연구에 따르면, 화산쇄설류의 직접적인 경로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이들 외에도, 폭발의 가장자리나 항구에 정박해 있던 배 위에서 수십 명의 사람들이 심각한 부상을 입고도 목숨을 건졌다.
다음에 이어질 이야기들은 그 수많은 생존자 중에서도 가장 놀랍고 생생하게 기록된 이들의 증언이다.
3.1. 감옥이 피난처가 된 남자: 뤼드게 실바리스
흑인 막노동자 뤼드게 실바리스 (Ludger Sylbaris, 다른 기록에는 루이오귀스트 시파리스(Louis-Auguste Cyparis)로도 알려짐)는 폭발 전날 싸움을 벌인 죄로 지하 감옥 독방에 갇혀 있었다.
창문 하나 없는 이 폐쇄적인 공간은 역설적으로 그를 지켜주는 피난처가 되었다.
그는 훗날 당시의 공포를 이렇게 회상했다.
"갑자기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어. 감방의 작은 창살 틈으로 뜨거운 재와 검은 연기가 미친 듯이 쏟아져 들어왔지. 숨을 쉴 수가 없었어. 이게 지옥인가 싶었어."
화산쇄설류가 도시를 휩쓸고 지나갈 때, 두꺼운 돌벽이 그를 지켜주었다.
그는 심한 화상을 입었지만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폭발 사흘 뒤, 폐허 속에서 그의 목소리를 들은 구조대에 의해 발견된 그는 모든 죄를 사면받았다.
이후 그는 '바넘 & 베일리 서커스단'에 합류하여 자신의 감방 모형 안에서 끔찍했던 경험을 증언하며 살다가 1929년 세상을 떠났다.
3.2. 모든 것을 목격한 구두 수선공: 레옹 콩페르레앙드르
도시 외곽에 살았던 구두 수선공 레옹 콩페르레앙드르(Léon Compère-Léandre)는 자신의 집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그의 증언은 재앙의 순간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끔찍한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느꼈고,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으며,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졌습니다. 팔과 다리, 온몸이 불타는 듯했습니다. 저는 테이블 위로 쓰러졌습니다. 바로 그때, 다른 네 사람이 고통에 울부짖으며 제 방으로 피신해 들어왔습니다. 10분쯤 지나자 그중 한 명인 어린 델라보 소녀가 죽었고, 다른 사람들은 떠났습니다. 정신을 차려 다른 방으로 가보니, 델라보 씨의 아버지가 침대에 누운 채 숨져 있었습니다."
그는 남은 힘을 다해 6km를 달려 겨우 탈출했지만, 그가 겪은 정신적 충격은 엄청났다.
구조대원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발견되었을 때 "지옥이다! 지옥이다! 모든 게 불바다야! 하하하!" 라고 외치며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고 한다.
그는 이후 8월 30일에 있었던 2차 폭발에서도 살아남는 불운과 행운을 동시에 겪었다.
하지만 평생을 그날의 트라우마 속에서 사람들을 피하며 조용히 살다가 1936년 눈을 감았다.
3.3. 바다로 피신한 소녀: 아비브라 다 이프릴
열 살 소녀 아비브라 다 이프릴(Havivra Da Ifrile)은 엄마의 심부름을 가던 중 재앙과 마주했다.
그녀의 증언에 따르면, 산비탈에서 '끓는 붉은 강'이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것을 본 소녀는 본능적으로 해변으로 달렸다.
그녀는 오빠의 작은 보트에 뛰어들어 필사적으로 바다를 향해 노를 저었다.
하늘에서는 뜨거운 돌과 재가 비처럼 쏟아졌고, 작은 보트는 곧 불길에 휩싸였다.
그녀는 불타는 보트 조각을 붙잡고 망망대해를 표류했다.
죽음의 문턱에서 절망하던 그녀는 기적적으로 프랑스 군함 '쉬셰(Suchet)' 함에 의해 구조되었다.
그러나 그녀의 이야기는 많은 역사학자들의 기록에서 제외되는데, 그 진위가 불분명하고 화산쇄설류의 직접적인 경로에서는 벗어나 있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3.4. 불타는 항구의 증인들: 로라이마호 선원들
항구에 정박해 있던 캐나다 상선 로라이마(Roraima)호는 화산쇄설류를 정면으로 맞았다.
선원 제임스 테일러(James Taylor)의 증언은 당시의 참상을 고스란히 전한다.
"불의 파도가 우리를 덮쳤습니다. 마치 수천 개의 대포를 한꺼번에 쏘는 소리 같았죠. 갑판 위 동료들의 절반 이상이 순식간에 불타 죽었습니다. 살아남은 동료들은 몸이 타들어가며 물을 달라고 애원했지만, 녹아버린 기관지 때문에 물을 삼킬 수조차 없었습니다. 그들의 고통을 끝내주기 위해 우리가 했던 일은... 살인이라고 할 수 없을 겁니다. 그건 자비였습니다."
로라이마호 선원 20여 명은 천운으로 살아남았지만, 동료들의 끔찍한 죽음을 목격하고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선택을 해야 했다.
이 기적적인 생존은 그들에게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고, 마르티니크의 비극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4. 잿더미 속에서 계속되는 비극
5월 8일의 대재앙은 비극의 끝이 아니라, 잔혹한 서막에 불과했다.
생존자들의 안도는 곧 다시 절망으로 바뀌었다.
참사 소식을 듣고 생존자 수색과 도시 재건을 위해 파견되었던 프랑스 구조대와 해군 장병들은 희망을 안고 잿더미를 파헤치고 있었다.
그러나 5월 20일, 몽펠레 화산이 다시 한번 불을 뿜었다.
이 잔인한 두 번째 타격은 구조 및 복구 작업을 하던 2,000여 명의 희생자를 낳으며, 갓 피어나려던 희망의 싹을 짓밟아버렸다.
약 3개월 뒤인 8월 30일, 화산은 끔찍한 마지막 장을 펼쳐 보였다.
이번 화산쇄설류는 동쪽의 르모른루주(Le Morne-Rouge) 마을을 덮쳤다.
이 재난으로 1,000명 이상이 추가로 사망했다.
놀랍게도 1차 폭발 생존자였던 레옹 콩페르레앙드르는 이곳에서 또다시 지옥을 겪고도 살아남았다.
화산은 섬의 북부에 안전한 곳은 없다는 사실을 피로 증명했다.
5. 몽펠레 화산이 남긴 교훈
5월 8일의 폭발로 약 3만 명이 사망했으며, 5월 20일과 8월 30일의 추가 폭발로 총희생자 수는 3만 3천 명을 넘어섰다.
20세기 최악의 화산 재해로 기록된 이 사건은 현대 화산학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과학자들은 이 사건을 통해 화산쇄설류의 파괴적인 힘을 처음으로 인식하게 되었고, 이와 유사한 형태의 폭발을 '펠레식 분화(Peléan eruption)'라고 부르게 되었다.
몽펠레 화산의 비극은 예측 불가능한 자연의 분노와, 과학적 경고를 묵살한 정치적 오만이 빚어낸 끔찍한 인재(人災)였다.
잿더미 속에서 피어난 기적적인 생존자들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자연 앞에서 겸손해야 함을, 그리고 지도자의 책임이 얼마나 무거운지를 오늘날까지도 생생하게 경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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